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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스 Nov 09. 2023

흐르는 계절처럼

놀이터의 새로운 풍경

 이틀 전에는 겨울이었던 날씨가 예년 기온을 되찾았다. 꺼냈던 겨울 외투들을 입으려다 말고 가을에만 입을 수 있는 트렌치코트를 걸쳤다. 영하까지 떨어졌던 기온은 제자리를 찾았기에 트렌치코트 안의 니트가 더부룩하게 느껴졌다. 얇지만 목까지 덮어주는 가을과 겨울 사이의 어울리는 하얀색 티셔츠를 찾았다. 옷장의 묵은 냄새가 배어 있는 티셔츠에 샤워 후 뿌리는 바디 미스트를 뿌려주었다.


 아이들이 등교와 등원을 하고 나면 마치 약속에 늦은 사람처럼 후다닥 뛰어가던 도서관에 오늘은 가지 않았다. 어제는 유독 조용했던 도서관에서 두들겼던 키보드 소리가 민폐가 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라떼를 산책시키며 가을 냄새를 맡았다. 오늘은 잔잔한 바람에 낙엽 굴러가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한동안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았는지 수다스럽게 온 거리를 누비고 다녔건만.


  혼자 끄적였던 일기는 초등학생 시절의 일기장과 다를 게 없다. 하루 일과를 나열하고 오늘의 기분을 하나 던지면 끝나는 일기장. 자기 전 따뜻한 물 한 모금 베어 물고 자는 것처럼, 자기 전 포근한 이불 돌돌 말아 책 한 장을 읽는 것처럼, 일기는 나에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일과였다. 지루하지만 매일 다른 기분과 작은 일상의 변화들이 빼곡한 일기장을 브런치로 옮겼다. 읽을 준비가 된 독자들과 문학가들 사이에서 나의 일기장은 초라했고 그래서 망설여진다. 그 망설임은 주저함으로 변질되어 매일 일기를 미루는 습관이 되어버렸다. 오늘은 그 부담을 조금 덜어내고 맥북을 열어본다. 주제 없는 일상의 기록들은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미래의 나를 위한 비계(飛階)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엄마, 오늘은 봄 날씨 같지 않아?" 1호가 등교하며 건네는 말에 엄마도 그렇게 생각했다며 반가워했다. 지난주에는 꼭 봄날처럼 포근하고 따뜻했다. 아이들이 돌아온 한가로운 오후에는 따뜻한 볕을 아이들과 같이 누리고 싶었다. 아이들은 피곤한지 집에 들어오면 다시 나가는 것을 꺼려한다. 특별한 건수가 있어야 나가는 아이들에게 고민 끝에 "오늘은 외식하자!"라며 외출거리를 던져놓는다. 엄마가 해줬던 요리들이 워낙 심심해서인지 외식을 참 좋아하는 아이들은 신이 나서 던져놓은 미끼를 덥석 물어준다. 하루에 두세 번도 더 나가 놀았던 놀이터에 잘 나가지 않은지 꼬박 일 년은 된 것 같다. 일 년 사이에 놀이터의 풍경은 낯선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들로 뒤바뀌었다. 아이들이 매일 놀던 익숙한 놀이터에 낯선 사람들이 있는 모습에 흘러가는 시간들이 작은 세월로 느껴진다. 겨울이면 낙엽을 벗어놓고 봄이면 새로운 잎들을 걸치는 나무처럼. 사계절이 흐르는 동안 아이들도 흘러갔다. 미끄럼틀을 좋아하던 아이는 킥보드를 타고, 그네를 잘 타던 아이는 친구들과 놀이에 흠뻑 빠졌다. 삼삼오오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은 놀이터 뒤편에서 축구를 한다. 늘 나와있던 그들의 부모들도 이제 먼발치에서 아이들을 지켜보거나 놀이터에 부러 나오지 않는다. 


 영원할 것 같던 일상들이 새로운 계절처럼 천천히 그리고 새롭게 스며든다. 미처 느끼지 못할 만큼. 가끔은 그립다.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이기에, 그 시절에만 누릴 수 있는 풍경과 기쁨이기에 그립지만 미소 짓는다. 새로운 풍경으로 노는 아이들은 그리울 세 없이 마냥 즐겁기 때문이다. "지나고 보니 너희 어렸을 때가 힘든 줄도 모르고 제일 재미있었어" 친정 엄마가 자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지난 과거보다 점점 행복해지는 오늘이 어쩌면 내 삶에서 가장 화려한 감정들을 뿜어내는 순간일 수도 있다. 아무 고민 없는 맑은 미소와 동심으로 뛰노는 아이들이 있어서 행복하다. 오늘도 그런 아이들과 순간을 즐기리라 행복한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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