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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스 Oct 30. 2023

친정 아빠를 닮은 남편

 이른 아침 시간, 친정 아빠의 통화 버튼을 잘못 눌렀다가 급하게 빨간색 종료 버튼을 눌렀다. 잠시 뒤 걸려온 따뜻한 친정 아빠의 음성에 "아빠가 보고 싶어서 전화했지"라고 넉살을 부렸다. 어제 아빠와 저녁을 먹었는데도 말이다.


 몇 달 전, 엄마의 속앓이를 생전 처음 듣고 하루는 격분에 차올라 가슴이 두근댔다. 당장 아빠에게 편지를 써서 엄마에 대한 분노를 대신하고 싶었는데, 미루다 보니 감정은 사그라 들었고, 엄마와 아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잉꼬부부처럼 지내신다. 유년기 시절 내가 바라보았던 부모님은 늘 그랬다. 아빠는 '너무 엄마만 위하는 태도'를 취하셨고 그것이 너무 지나쳐 질투까지 났던 적도 더러 있었다. 두 손을 맞잡고 걸어가는 부모님의 실루엣은 미래의 내가 바라던 부부의 모습이었다. 60대 초반인 지금도 두 분은 잉꼬부부가 따로 없다. 겉으로 오가는 말들은 티격태격할지라도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과 마음은 사뭇 다르다. 마음을 들여다볼 순 없어도 고스란히 그 감정이 전해졌다. 그 두 분의 사이를 끼어들려고 했던 지난날의 고민의 시간들은 사치로 남겨졌다. 당시에는 너무 '충격적인' 엄마의 말들과 엄마의 상처를 어림짐작하여 동생과 수화기 너머로 아빠를 흉보고 질책하기 바빴다. 이번만큼은 내가 편지라는 실행력을 미뤄둔 것이 참 잘했다 싶었다.


 


 한 낮과 새벽의 일교차는 10도 안팎으로 벌어져 하루를 길게 사용한 날에는 마치 두 계절이 공존하고 있는 것 같다. 선선한 여름의 낮과 혹독한 겨울의 아침.


 당일 여행에 재미 들린 요즈음, 지난 주말에 가평에 다녀올 계획을 세웠다. 왕복 300km의 운전도 거뜬한 나라서 가평의 킬로수는 별것 아니었다. 남편은 조수석에서 더 잘 수 있음에 오히려 장거리 여행길이면 환호를 불렀다. 강원도 부근은 주로 평일에 갔던 기억은 오래전 잊었다. 토요일 오전 7시 50분에 출발한 가평의 도착 예정 시간은 1시간 30분 후였는데, 1시간 30분을 운전해서 가도 내비게이션의 예상 시간은 줄어들지 않았다. 하남 부근에서 빠른 결단이 필요했다. 정체 중인 차 안에서 하남 부근의 아이와 가볼 만한 곳을 검색했다. 퇴촌의 어느 식물원이 눈에 띄었다. 행선지를 바꾸고 식물원에 도착하니 식물원의 개장 시간 40분 전이었다. 대단한 명소에 온 것처럼 식물원에 개장하기 40분 전에 오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남편의 유쾌한 농담이 한몫했다. 아이들은 장소를 급하게 변경하였으나 늘 그렇듯 아이들에게 장소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남들은 휘리릭 지나쳐 갈 식물을 머릿속에 그려 넣기라도 하듯 한 참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작은 돌들과 낙엽을 쓸어 모아 한 없이 즐거워한다. 그런 아이들을 보고 남편은 오늘도 호소한다. "예상시간이 1시간이라고 하던데, 식물원 절반 구경하는데 4시간 걸렸어!"


 진흙에서 놀다가 2호의 신발이 흙 속에 파묻혔다. 화장실에 가서 진흙 범벅이 된 신발을 씻으려던 참에 2호는 기분이 무척이나 상기되어 있다. "엄마! 맨 발로 걸으면 건강에 좋지? 나 건강 좋아졌어?"라며 식물원 곳곳을 맨발로 다니며 신나 하는 2호의 감정이 참 맑고 예뻤다. 진흙을 흐르는 물에 씻어내고 나서도 2호는 맨 발로 걸었고, 우리는 그렇게 깨끗이 씻은 2호의 신발을 햇볕에 말리려고 차의 보닛 위에 두었다. 집으로 향하는 차 안, 30km 정도 식물원을 지나오는데 남편은 갑자기 그 신발의 행적을 묻는다. 블랙박스를 뒤져보니 차가 출발하면서 보닛에서 떨어지는 2호의 신발이 버젓이 녹화되었다. 고민하지 않고 유턴하는 나에게 남편은 미안해하고 고마워했다. 역으로 나는 그런 남편의 마음이 더없이 고마웠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늘 꼭 다퉜다. '탓'하기에 바빴고, 어느 결단이 더 지혜로운지 가늠하느라 목소리를 높이려 했다. 그랬던 당신과 나 사이에 다정한 교류가 흐르는 사실만으로 감사했다.


 오늘도 성공일기를 쓰려고 했는데 감사일기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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