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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스 Dec 04. 2023

집에서 노는 엄마

소득 없는 전업맘에 대한 불편한 잣대

  이런 내가 무서울 정도로 책을 읽었다. 몇 분의 조각 시간만 생기면 책을 펼쳐서 활자를 보며 평안을 찾았고, 서가에서 한 주에 다 읽지도 못할 버거운 권수를 냅다 대출해 왔다. 주로 읽는 장르는 자기 계발서였고 그 책들을 읽으면 마치 책에서 나에게 주술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그다음의 성공은 너야.', '안주하지 말고 계속 전진해!' 책 속에서 주는 당근을 마구 삼키며 본업인 살림은 제쳐두고 독서에 푹 빠져있었다.


 어느덧 마지막 장의 달력을 넘긴다. 매년 12월이면 으레 하던 아이들의 예쁜 사진을 담은 달력을 주문하고 크리스마스 카드를 양손 가득히 샀다. 주말에는 미뤄두었던 창고의 트리를 꺼내 거실 한 켠에 설치하니 연말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주로 영어 동요가 나오는 거실의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캐럴로 BGM을 바꿨다.


 고양이들이 트리의 전구와 오너먼트를 장난감 삼아 가지고 놀고 이내 트리를 나무처럼 타고 올라 다닌다. 문득 지난번 시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부자가 되려면 애완동물도 키우면 안 돼" 유튜브를 즐기시는 시어머니는 어느 부자 유튜브의 말을 인용하셨다. 첫 아이가 돌 무렵 '전업맘'이었던 나에게 '이력서'를 갖다 주셨던 당신이기에 말씀 하나하나에 가시가 돋친 듯 따가웠다. 생활비는 얼마나 나오냐는 물음도 '돈벌이도 못하는 주제에 가정 운영은 얼마나 하나 보자'처럼 왜곡해서 들렸다.


  분초단위로 시간을 아껴 쓰는 습관은 여전하다. 지난달 인터넷쇼핑몰을 폐업하고 그야말로 '백수'임에도 뭐가 그렇게 바쁜지 아침과 점심을 거르며 시간을 활용한다. 2년 정도 지속 중인 간헐적 단식을 올해부터는 하루 5시간만 음식을 섭취하도록 단식 시간을 더 늘려봤다. 5시간 섭취하는 간헐적 단식의 가장 큰 장점은 거르는 식사만큼의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시간을 아껴가며 하는 일이라고는 소득 없는 읽기와 쓰기 그리고 미래를 전망하는 블로그와 인터넷 카페 운영이다.


 연말이라 그런지, 시어머니의 말씀 때문이었는지 성과 없는 지금을 돌아본다. 주춤하기에는 내가 달려왔던 트랙이 너무 짧다. 3호가 유치원에 정상 등원을 한 게 지난 9월 무렵부터이니 고작 3개월 달리고 얼마나 왔는지 뒤를 돌아보려 했던 것이다. 막연한 미래를 그리는 요즈음, 곧 방학이라는 정체기가 찾아온다. 이듬해 겨울 지금과는 사뭇 달라질 나의 모습을 그리며 인생의 2막을 준비해 본다.

 

 아이들끼리 역할놀이를 할 때면 알 수 있다. "엄마 운동 갔다 올게", "엄마 설거지 좀 할게" 엄마 역할을 맡은 아이가 하는 일이라곤 대부분이 집안일이고 집 범주를 넘어가는 일이라고는 운동을 가는 일이 전부다. 엄마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아이들은 문득 등원하기 싫은 날 엄마를 부러워했다. 엄마가 되고 싶다던 아이의 토로에 그 이유를 물었고 돌아오는 답변에 나는 적잖이 충격받았다. "엄마가 되면 유치원 안 가고 집에서 쉴 수 있잖아." 소득이 없으니 집에서 쉬는 것이 맞는 말이긴 하다만 아이들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 영 불편했다. 서둘러 변명 같지도 않은 말들을 아이들에게 퍼부었지만 그런 나 자신이 초라했다. 


 아이들에게 '할 일 없이 노는 엄마'로 보일까 봐 아이들 등원을 마치고 나면 애써 혼자서 바쁜 척을 한다. 집에만 있으면 정말 '집에서 쉬는 엄마'처럼 늘어질까 봐 맥북과 읽고 있는 책들을 가지고 도서관에 간다. IT개발자 아빠를 "우리 아빠는 컴퓨터 일을 해"처럼 아이들이 엄마를 소개할 때 명확한 단어를 고를 수 있게끔 나를 만드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작은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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