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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스 Apr 29. 2024

힘 빼고 육아하기

소리 지르지 않는 양육 태도

"힘들이지 않고 육아하시는 것 같아요. 저는 하나도 힘들어서 큰 소리 내기 바쁜데, 세 아이를 소리 한 번 지르지 않고 키우시다니요."

"아하하 그런가요?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부쩍 친하게 지내는 2호 친구 엄마의 인사말이다. 나를 보는 제삼자의 평가는 여전했다. 그중 또래 엄마들의 이목을 사는 건 단연 '소리 지르지 않는 육아'였다. 그녀들은 그런 나를 보고 '육아 체질'이라며 나를 우러러보곤 했다. 언제부턴가 칭찬을 들으면 부정하지 않으려 애쓴다. 우리나라 국민 정서상 칭찬을 받으면 온몸을 이용하여 손사래 치는 것을 으레 '겸손'이라고 간주한다. 30년 넘게 해 오던 부정의 손사래를 근 몇 년 사이에 끊어냈다. 칭찬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태도, 그것은 나의 성장과 더불어 상대방에 대한 예의라는 새로운 시각이 생긴 것이다.


 오만해 보이진 않았으리라. 나는 정말 아이를 꽤 잘 보는 편이고, 외부에서 만큼은 '소리 한 번 지르지 않고' 아이를 돌보기 때문이다. 


 나도 사람인지라 소리 지를 줄도 알고 화도 낼 줄 알건만, 그런 부정의 에너지는 쏟으면 쏟을수록 나만 힘들게 된다는 것을 아이를 키우며 새삼 깨달았다. 이해할 수 없는 아이의 행동을 보고 화가 나는 것은 아이의 잘못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아이를 다시 관찰하다 보면 그것은 절대 화를 낼 이유가 못되었다. 


 어른인 나도 실수투성이인데 나보다 인생의 경력이 짧은 아이가 실수를 하는 것은 당연한 처세였다. 잘못을 하면 일러주면 되는 일이었고 화가 나더라도 소리 지르지 않고 충분히 의사를 전달할 수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아이는 작을 뿐 어른과 다르지 않은 하나의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유독 아이에게 에너지를 쏟는 부모들이 있다. 그것은 긍정의 에너지일 수도 있고, 부정의 것일 수도 있다. 최근 눈에 띄는 아이 엄마가 있다. 아이에게 온갖 핀잔을 주는 그 소리에 나는 이맛살을 찌푸린다. 오죽하면 아이가 가엽다는 오지랖이 느껴질 정도다. 그녀는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사사건건 아이에게 일명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찻 길 근처에라도 가면 그녀의 데시벨은 최고조에 이르며 악을 쓰며 아이의 이름을 부른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아이가 울면 그녀의 짜증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녀는 아이의 이름 대신 '야'라는 간편한 호칭으로 아이를 대했다. 


 나도 한 에너지 하는 편이다. 양육이 지난 내 인생의 전부였고 그 안에서 얻는 기쁨이 아주 위대했기에. 양육이 나에게 안겨준 것은 힘듦보다 기쁨이 더 많았기에 내 에너지는 긍정의 것이었다. 그러기에 내가 바라보는 그녀는 더없이 안쓰러웠다. 


 그런 그녀의 아이들을 잠시 돌봐줄 일이 생겼다. 그녀는 무엇을 사러 잠시 자리를 비웠고 그녀의 두 자녀는 나의 아이들과 어우러져 시간을 보냈다. 장소는 양 옆이 차도로 되어 있는 운동장이었지만 위험한 일도 행동도 없었다. 그녀의 아이들은 그렇게 40분가량을 자유롭게 뛰어놀았다. 나는 멀리서 그녀의 아이들을 관찰했다. 아이들은 맑고 예뻤다. 아이들 사이에 내가 개입할 만큼의 어떠한 그릇된 행위도 하지 않았다. 억압에서 해방된 아이들은 그 짧은 자유를 온몸을 이용해서 만끽했으리라.


"아이들이 참 예뻐요. 가만히 두세요. 괜찮아요. 놀다가 다칠 수도 있고, 넘어질 수도 있죠. 많이 힘드시죠? 그런데 아이들은 생각보다 저들끼리 안전하게 잘 놀더라고요. 아이를 믿지 못하면 그 누구도 아이를 믿어주지 않을 거예요. 아이 스스로도요. 아이를 믿어보세요. 그리고 엄마의 평온도 챙기세요."

 

주제넘은 이야기들을 혼자 되뇌다가 결국 꿀꺽 삼켜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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