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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스 Nov 21. 2023

도리(道理)가 없다

  부쩍 한가한 일상을 보내시는 친정 아빠의 안부가 궁금했다. 궁금하면 여쭤보면 될 것을, 그러지 못했다. 아빠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내내 집에 계셨다. 그 시간이 하루하루 쌓여가는 동안 내가 추측한 어떠한 부정이 확신으로 다가왔다. 친정 부모님을 자주 만났지만 아빠의 회사에 대해서는 부러 얘기 나오는 것을 회피했다. 


 몸이 예전 같지 않은 부모님은 올해부터는 김치를 사서 드신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손맛을 전수해 주신다며 딸인 나를 부르셨다. 텃밭에서 수확한 달랑무를 손질하고 부모님과 김장 재료를 사러 시장엘 갔다. 장바구니 가득 싫은 재료들은 20만 원이 훌쩍 넘었다. 아빠는 늘 자식들이 계산하는 꼴을 못 보셨고 그게 습관이 되어서 아빠가 계산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오늘은 왠지 모르게 아빠의 계산이 불편했다. 


 남편은 아이 셋을 데리고 시댁에 갔다. 친정에서 친정 부모님과 김장 재료를 손질했다. 이렇게 있으니 꼭 결혼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적막이 달콤해서 김장이라는 노동이 힘든 줄 몰랐다. 아빠가 잠깐 나가신 낮에 엄마에게 아빠의 안부를 조심스레 여쭤봤다. 내 예상은 틀림이 없었다. 엄마 입에서 직관적인 대답을 들으니 마음이 아려왔다. 왜 우리 아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세상을 원망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빠는 아직도 팔팔한 6학년 2반인데 말이다. 오늘날 중년이라 불리는 나이에, 나이 때문에 "해고"라고 하니 서글펐다. 아빠는 40년 넘게 일해온 그곳에서 정나미가 한 톨도 남아있지 않다고 하셨단다. 인생의 후반부를 준비하듯 새로운 직업군으로 뛰어들 예정이라는 아빠의 미래에 깊은 날숨을 뱉어냈다. 자기 계발서에서나 담겨있는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란 없다"를 아빠는 실행할 예정인 것이다. 응원해줘야 할 아빠의 미래가 어두워보였다. 


"일은 무슨, 이제 인생을 즐기세요."라고 외치고 싶었는데 아무 말도 못 했다. 이제는 내가 부모님을 챙겨드려야 할 나이에 진입했음에도 내 자식들 입에 풀칠하느라 바쁘다. 현실을 부정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아빠가 계산하시던 뒷모습이 떠올랐다. 부모님은 늘 말씀하셨다. "우리가 사줄 수 있을 때 마음껏 사 줄 테니까 먹기만 해" 어쩌면, 그 시기가 부쩍 앞당겨질 수도 있다. 타자에 의해서. 10년은 더 일하실 거라고 말씀하셨던 아빠는 갑자기 길거리서 배회하게 되었다. 그런 아빠의 모습이 등이 굽은 노인처럼 노쇠하게 느껴졌다. 


 뭔가 드리고 싶은데 그러기에 넉넉지 않은 내 사정에 열열하다. 드린다고 받으실 분들도 아니지만 얇은 지갑은 마음까지 얄팍하게 만들었다. 부모님께 괜히 죄송하면서 미래의 나를 그려본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들이 선명해진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빠의 선택을 응원하는 것뿐이다.


"사랑하는 아빠, 아빠가 무엇을 선택하든 그 길을 응원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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