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수박에 관한 추억
날씨가 차차 더워지면, 생각나는 과일이 있다.
수박!
여름철에 나는 과일이 많고 많지만, 유난히 수박이 좋다.
수박을 냉장고에 넣어 시원하게 만든 다음,
칼로 깍두기처럼 잘라서 큰 그릇에 담아 가족이 모여 앉아 포크로 수박을 나누어 먹는 맛이 참 좋다.
어린 시절에는 수박 농사를 짓는 집이 아니면, 수박이 귀했다.
가끔씩 엄마가 시장에 갔다가 수박 한 통을 사 오면,
찬 우물물에 담가 두었다가 시원해진 수박을 화채로 만들어 가족이 함께 먹었던 기억이 난다.
식구는 많고, 수박 한 통은 늘 부족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쯤으로 기억한다.
이웃 동네 사는 같은 반 친구가 자기네 수박 밭을 자랑했다.
집에서 수박 농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우리 집에 가면, 수박 실컷 먹을 수 있어."
친구가 은근히 자기네 수박 자랑을 늘어놓았다.
하교 길에 친구 두세 명이 그 친구네 집으로 따라갔다.
수박 밭은 친구네 집에서 한 5분 거리쯤 되는 곳에 있었고,
어른 머리 정도 되는 수박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친구는 호기롭게 말했다.
"먹고 싶은 거 골라서 따먹어."
"진짜? 먹어도 돼?"
친구는 으스대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곧바로 잘 익어 보이는 수박 한 통을 따서
밭 머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주먹으로 '퍽' 때려서 수박을 깨고,
손으로 조각을 내서 맛있게 나누어 먹었다.
밭에서 갓 따서 시원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수박은 꿀맛이었다.
그때처럼 그 친구가 위대해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친구보다 다섯 살쯤 위인 친구 누나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다가와서 차갑게 한마디 했다.
"너희들 거기서 뭐해? 누가 마음대로 수박 따먹라고 했어?"
친구 누나는 우리와 자기의 동생을 번갈아 보며 눈을 흘겼다.
우리는 '수박 서리'를 하다가 들킨 것 이상으로
얼굴이 수박 속처럼 빨개졌다.
멋쩍은 눈으로 친구를 쳐다보았다.
친구는 애써 우리의 눈을 슬쩍 피하면서 자기 누나에게 말했다.
"내가 먹으라고 한 거 아니야. 얘들이 자꾸 먹고 싶다고 해서 할수없이..."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우리를 무척 난처하게 만들었다.
너무 기가 막혔지만, 거기다 대고 뭐라고 항변을 할 수 없었다.
좀 전까지 영웅처럼 보이던 친구가 한없이 얄미웠다.
그 뒤의 일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학교 가서 두고 보자.'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요즘은 제철은 물론이고, 겨울에도 수박을 먹을 수 있을만큼 수박이 참 흔하다.
마음만 먹으면 마트에서 수박 한 통 사서 냉장고에 넣고 며칠 씩 두고두고 먹는다.
지금도 물론 수박은 달고, 시원하지만,
어린 시절에 먹던 수박의 맛과는 비교할 수 없다.
어린 시절 한 때의 '수박 서리'에 관한 추억은
지금도 수박을 먹을 때마다 문득문득 떠올라서
괜히 씁쓸한 미소가 지어진다.
수박을 좋아하는 것도 유전인가?
아들도 나를 닮은 듯, 수박을 무척 좋아한다.
둘이 마주 앉으면 수박 한 통을 다 아작낼 기세로 먹어대기도 한다.
어느 해 아들의 생일에
좀 색다른 생일축하를 하기로 했다.
4월이라 수박이 좀 귀하기는 했지만,
흔한 생일 케이크 대신에 수박을 사서
반을 뚝 잘라 거기에 초를 꽂고 불을 붙였다.
수박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색다른 생일 파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