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의 듣기 여행-94일 차(호주 시드니+케언즈)
시드니 마지막 날을 다시 지인과 보내고 헤어질 땐, 아쉬움이 잔뜩 커져있었다. 폐 끼칠까 봐 주중에 연락을 하거나 방문하지 않은 것이 안타까웠다. 토요일에라도 놀러 갈걸. 그래도 호숫가도 함께 산책하고 야경도 구경하며 남은 시간을 아껴 썼다. 점심엔 미역국과 저녁으론 LA김밥.
LA 김밥이란 월남쌈처럼 아보카도를 비롯한 갖가지 채소, 어묵, 햄, 계란 등을 길쭉하게 썰어서, 꼬마김밥 크기의 김에 밥을 넣고 즉석에서 말아먹는 음식이다. LA갈비, LA찹쌀떡(이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과 함께 우리 음식을 현지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를 가지고 만든 것이다. 요즘에야 어디서든 한식 재료를 쉽게 구하지만, 초기 이민자들의 음식에 대한 그리움과 창의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누나, 밥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재료를 많이 넣어야 많이 먹을 수 있어요."
천사 같다던 청년이 두 번이나 조언을 해줬지만, 내 김밥엔 밥이 자꾸 많이 들어갔다. 이 댁에서 말고는 시드니에서 쌀을 먹지 않아서였나 보다. 체면 생각할 틈도 없이 양에 넘치게 먹었다. 배부른 가운데서도 맛이 좋았는데, 한국서 같은 재료로 만들어도 이 맛이 안 난다고 하는 말이 와 닿았다. 한국 채소는 향이 적어서, 에콰도르서 해 먹던 음식이 한국선 제대로 맛이 안 났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공항까지 가는 차 안, 내리는 순간까지도 옛 추억을 나누다가 드디어 헤어지는 순간이 왔다.
"이제 또 언제 보냐."
10년이 순식간에 지나갔고, 다음 만남을 헤아릴 수 없었지만 나는 자못 경쾌하게 답했다.
"제가 결혼해서 신혼여행으로 오길 빌어주세요."
그 말에 꼭 그랬으면 좋겠다며 와하고 웃으며 작별했다. 뭐, 그 말이 실현되려면 일단 남자부터 만나야 하고, 결혼을 약속해야 하고, 그와 의견도 맞아야 하고, 갈 길이 멀지만, 말에 힘이 있다고 보고 일단 던져본다.
시드니 다음으로 도착한 케언즈는 정말 신혼여행으로 오기 적당한 곳이었다. 그간 쌀쌀했던 날씨 대신 적당하고 기분 좋은 햇볕으로 따스했다. 휴양지답게 사람이 적진 않았으나, 도시와 달리 사람들의 걸음은 느긋하고, 카페에서 커피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몸짓에도 재촉함이 없었다. 칸쿤, 발리, 케언즈까지. 남들이 신혼여행으로 올 법한 장소를 나는 참 혼자 잘도 다니고 있다. 신혼여행이야 어디든 어떠랴. 다닐 만큼 다녀서인지 이제 그쯤 강원도로 가도 좋을 것 같다.
신혼여행으로 왔으면 좋겠지만, 내 평생에 있을지 없을지 모를 그것을 기다리며 모든 것을 미루기보단 오늘을 즐겨본다. 아! 푸른 하늘, 따스한 햇살 너 참 오랜만이다. 첫날은 비치가 해수욕하기 적당치않기에 대신 바다 앞에 인공으로 만들어놓은 라군에서 수영도 하고 누워 일광욕을 했다. 휴양지에 와선 휴양을! 한데 비치에 아무렇게나 누워 낮잠 자는 문화는 동양인에겐 익숙지 않나 보다. 그들은 인증샷을 찍고는 후루룩 사라지곤 했다. 바다 앞에서 낮잠 한번 자고 나면 그 매력에 빠져들 텐데. 간질이는 햇살을 받으며 나는 끔뻑 잠이 들었다. 새벽 비행의 피로가 가시고 그렇게 세상 근심 없을 수가 없다.
그런데 내가 떠난 시드니도 오늘 날씨가 무척 좋단다. 시드니 너, 나한테 왜 그런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