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일기처럼

100일의 듣기 여행-75일 차(뉴질랜드 인버카길)

by 유진아

새로 구한 숙소는 지금 내게 딱 필요한 곳이었다. 뉴질랜드 어느 집보다 따뜻했고, 욕조가 있었다. 여자 혼자 사는 집이라 깨끗하고, 부엌일을 하기에 편리했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낼 수 있었다. 아, 정확히는 혼자가 아니라 메이슨이라는 개 한 마리와 함께. 집주인은 손님이 신경 쓸까 개를 마당에 풀어놓았으나 뒤뜰로 향하는 문 앞에서 계속 꼬리를 흔드는 모습이 처량하여 들여놓을 수밖에 없었다. 커다란 개가 내 얼굴 높이까지 뛰어오르며 달려들거나, 몸을 파고드는 건 좀 부담스럽긴 했지만.


내리 비가 왔고, 집에 종일 있기로 마음먹었다. 헐거워진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오늘만큼은 나를 돌보기로 했다. 사골을 사다 끓였고, 망고를 깎아 먹었다. 빗소리를 들으며 커피를 마시다가, 욕조에 몸을 풀었다. 그리고 밀린 글을 썼다. 인터넷이 안되어서, 피곤해서, 귀찮아서, 추워서 미룬 여행기였다.


글쓰기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으면 늘 강조하는 것이 있다.' 일단 쓰라. 쓰면서 배우라. 꾸준히 쓰라. 많은 사람들이 재능이 없음을 한탄하지만, 성실이 더욱 중요하다' 하는 말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 깨닫지는 못한 말들이었다. 그러나 100일의 여행기를 기록해가며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 일인지 느끼게 됐다. 꾸준히 쓴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잊지 못할 경험들,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들을 글자로 옮기는 것은 한순간의 열정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하나 더, 퇴고의 중요성! 나름대로 꼼꼼히 읽으며 적었는데, 사이트에 올리고 다시 읽으면 오타나 비문이 눈에 띄었다. 고치고 싶은 문장도 꼭 있었다. 3차까지 수정해 컨펌받은 영화 평론은 전체 어조나 구조까지 바꿨었는데, 스트레스가 컸지만 완성하고 보니 내가 봐도 훨씬 나아져 있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지난한 노력이구나를 새삼 느꼈다.


이번 여행에서 배운 것이 많지만, '꾸준함'의 중요성을 체험하고 연습한 것이 큰 성과였다. 이 글들이 비록 몇 사람의 관심만 끌고 그쳐버릴 지라도, 하나의 주제로 지속해서 글을 쓴 경험 자체는 내게 자산이 될 터였다. 백수로 돌아갈 한국의 삶에 자신이 붙었다. 그리고 오늘자 즐거운 소식! 소개팅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아쉬움은 남겠지만, 귀국이 기다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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