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의 듣기 여행-90일 차(호주 시드니)
뉴질랜드에 있다 시드니에 오니 분명하게 체감되는 변화가 있었다. 밀도였다. 빽빽한 고층 건물들 사이와 다양한 노선의 지하철에 가득한 사람들. 석 달간 뉴질랜드에서 만난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을 하루에 만난 것 같았다. 거리를 걷다가 출퇴근 시간에 만원 지하철을 탔을 때 느끼는 것처럼, 갑갑하고 답답했다. 도시의 사람들은 너무 많고, 너무 빨랐다. 서울에서 왔다면 오히려 헐겁게 느껴졌을 수 있겠다. 그러나 나는 십 분을 걸어도 사람 하나 만나는 일이 드물지 않던 나라에 익숙해 있었다.
물론 시내 중심을 벗어나면 시드니의 주거지역은 뉴질랜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두 나라 국민들은 서로 이주하는 게 자유롭다더니, 마을의 풍경이 비슷했다. 집이나 길의 모양, 수거를 위해 집 앞에 내놓는 쓰레기통까지. 공원과 숲이 곳곳에 있었고, 바다와 강이 가까웠다. 그럼에도 조금만 시내로 나가면 사람들이 너무 가깝게 느껴져 나는 몸을 움츠리곤 했다. 도대체 서울에선 어떻게 살았던 거지?
벌써부터 뉴질랜드가 그리웠고, 자연이 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모처럼 비가 오지 않는 날을 맞아 산으로 갔다. 시드니의 자랑 블루 마운틴. 투어도 있었지만 전철로도 갈 수 있다기에 혼자서 길을 나섰다. 가는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나는 시간이 많으니까. 블루마운틴을 등반하기 위해 Katoomba역이나 Wentworth falls역에서 내리면 된다. 유명하기로는 전자 쪽이나, 나는 '길이 험하지만, 가는 길이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는 평이 있는 Wentworth falls 쪽으로 가기로 했다.
문제는 내가 전철을 타고 가던 중에 화장실이 너무 급해졌다는 것이었다. 출발하기 전 커피를 마신 것이 화근이었다. 너무나 활발한 이뇨작용! 블루마운틴행 전철은 한 시간에 한 번씩이라 내내 참다가 20분 남겨놓고 결국 내리고 말았다.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지, 하며. 급한 일을 보고 나서 찾아보니 다행히 버스가 있었다.
하지만 안 그래도 사람이 덜 다니는 코스에, 남들과 다른 시간에 혼자 뚝 떨어지니 길을 잘못 들었나 보다. 보이는 표지판대로 걸었는데, '험하다'는 길이 너무나 평탄했다. 등산객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개와 산책 나온 아저씨, 가족 단위의 피크닉 일행만 있었을 뿐이었다. 풍경도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정도가 아니었다. 이건 뭐 뉴질랜드 그냥 동네마다 있는 트레킹 코스잖아 싶었다.
끝까지 가고 나서야 내가 잘못 코스를 잡았단 걸 확실히 알았다. 길이 여러 개였던 것이다. 마침내 켜켜이 구름에 둘러싸인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봉우리들의 절경을 만났을 때, 심한 경사로를 타고 헥헥거리며 올라오는 등산객들을 만났다. 아마도 그들은 험하지만 탄성이 나오는 풍경들을 가까이 보며 올라왔으리라. '험해봤자 얼마나 험하겠어, 통가리로 알파인 횡단 코스도 올랐는데 그쯤이야' 생각하며 물 한병도 안 챙겨 온 주제라, 오히려 길을 잘못 들어 평탄하게 온 것이 다행스럽게 여겨질 정도로 길이 가파랐다. 그들이 올라온 길을 내려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게다가 저들이 저렇게 어렵게 올라와 본 장면을 나는 쉽게 와서 보니 더 좋은 거 아닌가? 생각하며.
돌아가는 길은 결국 그 밋밋한 코스로 돌아갔다. Wentworth falls 역의 절경도, 그렇다고 Katoomba 역 쪽의 유명 포인트들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덕분에 인구밀도만큼은 뉴질랜드와 다름없는 시간을 보냈으니 만족해보자. 아,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보니 전철 안에 화장실이 있는 것 같다. 나 오늘 뭐한 걸까.
그래도 가끔은 이런 허무한 하루도 나쁘지 않은걸. 허무한 하루에도 쉽게 실망하지 않는 나도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