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에세이_초고를 쓰는 일
작가들 사이에 금기시되는 대화 주제가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제 책 읽어보셨어요?”다. 보통은 안 읽기 때문이다. 물어본 사람도 무안하고 답하는 사람도 미안하니 서로 쓴 책에 대해선 이야기를 잘 안 한다. 프루스트랑 조이스도 서로 만났을 때 눈치 없는 호스트인 허드슨이 프루스트에게 『율리시즈』를 읽어봤냐고 했는데 대답은 ‘아니오’였다. 더 나쁜 건 읽어보니 별로여서 할 말이 없는 경우다. 조이스는 프루스트 작품을 읽어보았었고, 별 감흥이 없었다. 그래서 영리하게 침묵했다. 대화 주제가 부족하거나 양식적으로 작가 흉내를 좀 내야 하는 상황에선 앞으로 쓸 글에 대해 물어보면 좋다. 구체적인 글 내용에 대해선 꺼리는 작가도 간혹 있지만, 그건 중요하진 않다. 장르, 출판 시기와 출판사 따윌 물어보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로 전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금기시되는 대화 주제는 “오늘 글 좀 쓰셨어요?”다. 그 자리에 분명 한 사람은 자기 머리를 붙잡거나 말한 사람 멱살을 붙잡을 것이고 분위기가 험해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옆에서 담담하게 “좀 썼지” 같은 말을 하는 사람도 믿을 수 없다. 얼마나 썼냐고 물으면 “마이너스 5백 자” 같은 말을 들을지도 모르니까. 안타까움의 한숨이 들려온다. 종일 가만히 앉아 있다가 백스페이스키를 눌러 5백 자를 지웠다는 뜻이 아니다. 이해를 돕자면 이런 뜻이다. 도공이 오늘 종일 도자기를 구웠는데 성에 차지 않아 오늘 만든 도자기를 죄다 깨트리고 어제 만든 것도 하나 깨트렸다는 뜻이다. 물론 나는 공감할 수 있다. 나는 호텔 프린스에서 한 달간 있으면 마이너스 5만 자 정도를 썼다. 도자기를 백 개 정도 깨트린 셈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이것을 이해하려면 초고와 수정(revision)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초고라는 단어는 글을 고칠 것을 전제하고 있다. 두 번째, 세 번째가 없다면 왜 첫 번째가 있다고 하겠는가(사실 초고에는 처음이라는 뜻이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착각했으리라 믿는다)? 글을 쓴 뒤 출간 전 편집 단계에서 거치게 되는 퇴고(推敲, polishing) 및 윤문(潤文, line editing)만 하고서 ‘탈고를 했다’고 주장하면, 그 글에 대해 ‘초고를 썼다’고 할 수 없다. 난 퇴고와 윤문이 엄밀한 의미에서 글을 수정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작가는 그냥 원고를 탈고한 것이다.
글을 고치는데 다음과 같은 용어들이 쓰이곤 한다. 수정, 퇴고와 윤문, 교정과 교열, 편집, 고쳐 쓰기, 그리고 다시 쓰기(rewriting)이다. 이러한 용어들은 글쓰기 수업과 작법서에서 자주 혼용되거나 잘못 번역되어 일관성이 전혀 없다. 일관성이 부재한다는 이유로 좋은 소설을 쓸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진 않지만, 내가 생각하는 ‘다 구운 도자기를 깨트리는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선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좀 더 엄밀하게 정의할 것이다. 이를테면 수정은 편집을 제외하고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미 쓰여진 글의 요소를 바꾸는 작업으로 이하에서 설명되는 어휘 전체를 포괄하는 작업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퇴고는 보통 글을 수정한다는 뜻과 동의어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어원을 살리고 다른 수정 방법과 구분하자면, 퇴고는 단어 단위에서의 수정으로서 주로 시를 쓸 때 어휘를 고르는 등의 작업이다. 산문에서도 쓰인다. 대표적으로 김훈이 『칼의 노래』 첫 문장인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에서 ‘꽃은 피었다’의 조사를 ‘은’으로 둘 것인지 ‘이’로 바꿀 것인지 고민한 것이 대표적인 퇴고 작업이다. 글의 내용을 바꾸는 게 아닌 부분적인 뉘앙스를 다듬는 출간 전 마무리 단계에서나 하게 된다. 조각으로 하자면 윤을 내거나 톤을 맞추기 위한 마감제를 바르는 작업이다.
그리고 윤문이 있다. 윤문은 어휘 단위에서는 퇴고와 뜻이 겹치게 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작가의 작업일뿐만 아니라 편집자의 작업, 즉 편집에도 속한다. 작가로서는 문장 단위에서 글의 흐름과 운율을 개선하고 문장을 개선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편집자로서는 내용을 유지하면서 어색한 표현을 고치고 문체 균일하게 다듬는 등의 작업이 이루어진다. 경우에 따라 영문 번역 투와 일문 번역 투 문장을 고치는 과정이 추가되기도 한다.
교정과 교열도 있다. 교정은 맞춤법과 띄어쓰기, 문장 부호 오류를 고치고 오탈자를 찾아내는 기계적인 일이다. 교열은 내용의 사실관계를 바로잡고 용어를 통일하고 문맥을 일치시키고 출판사 내부 규정에 맞게 형식적 일관성을 갖추는 작업이다. 작가 스스로가 모르는 맞춤법을 맞출 수는 없고 출판사의 내부 규정도 알 수 없다. 즉, 작가의 한계 이상의 작업이므로 명백하게 작가가 할 수 없는 편집자의 일이다.
이러한 퇴고와 윤문, 교정과 교열 또한 글을 수정하는 방법이지만 출간 전에 재차 이루어지는 일이고 이중 일부는 작가의 일도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퇴고와 윤문, 교정과 교열은 글을 수정하는 것 아니라 ‘편집’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따라서 글을 쓰고 편집만 거쳤다면 그건 글을 수정한 것이 아니며, 초고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수정과 고쳐 쓰기는 둘 다 ‘revision’의 번역어인데, 문맥에 따라 두 가지 뜻으로 쓰인다. 하나는 수정으로서 작가가 글을 고치는 전반적인 작업 전체를 의미하는데 revision 외에 rewriting, edit가 쓰이기도 하는 등 영미권에서도 일관성이 없다. 이 글에서는 설명의 용의성을 위해 희미한 뉘앙스와 경향성에 기대 이를 구분할 것이다.
또 다른 의미인 고쳐 쓰기는 작가가 자신이 생각하는 글의 주제나 목적에 맞게 초고를 고치는 작업이다. 앞서 이야기한 퇴고와 윤문을 포괄하면서도 동시에 문장이나 문단 단위에서 다시 쓰거나 장면을 추가 또는 삭제하고 몇 개의 문단 또는 장 단위에서 글을 재배치한다. 형식만이 아니라 내용에서도 인물과 사건, 배경이 추가되거나 또는 제거될 수도 있고 플롯이 바뀌는 등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글을 수정하는 방법론이다.
다시 쓰기는 고쳐 쓰기와 혼용된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이에 대해 엄밀한 구분을 하지 않거나 자의적 기준에서 구분한다. 그럼에도 맥락상 고쳐 쓰기와 구분하는 경우 그 둘은 규모 면에서 지엽적이냐 전면적이냐는 차이가 있으며 다시 쓰기는 ‘초고를 처음부터 다시’ 쓰는 것을 뜻할 때도 있다. 다시 쓰기를 하는 이유는 글의 각 부분이 유기적인 맥락 안에서 의미가 창출되기 때문이다. 부분만 고치려는 작업은 결과적으로 부조화를 만들어 부분이 맥락으로부터 이탈되는 결과를 낳는다. 고쳐 쓰기에도 글에 자꾸만 문제가 생길 때 이를 해결할 최종적인 방법이 다시 쓰기가 된다. 나는 단편 소설을 쓸 때는 다시 쓰는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웹 소설 연재를 하는 경우다. 나는 호텔 프린스에서 웹 소설을 쓰고 있었다.
웹 소설은 결말까지 써두고 투고 및 출간되는 비웹 소설과 다르게 많아봤자 120화가량 정도만 쓰고 연재가 결정된다. 웹 소설 또한 세부 장르마다 다르지만 판타지는 한 화 5천 자 기준이고 120화면 장편으로 네 권 분량이다. 이 네 권이 전부라면 어떻게든 초고를 완결한 뒤 손을 보려고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네 권은 웹 소설의 완결된 상태가 아니다. 나는 웹 소설의 경우 지금까지 두 작품을 했는데 처음은 열한 권이고 그다음은 열세 권이었다. 작품이 얼마나 길어질지는 알 수 없으나 일반적인 판타지 웹 소설 기준으로 네 권이면 초반부다.
대기만성, 지긋하게 오래 쓰면 어떻게든 성과가 나오는 종류의 작업도 아니다. 웹 소설은 론칭하게 되는 그 초반부에서 성적이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에 이 도입부에 작가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걸 쏟아부어야 한다. 물론, 연재를 하면 연재하는 동안에도 계속 쏟아부어야 하지만, 그건 미래의 내가 할 일이고. 현재 내가 할 일은 론칭할 분량에서 ‘최선’을 다해 좋은 소설을 쓰는 것이다. 이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마감에는 끝이 있다. 하지만 최선에는 끝이 없다.
내가 아는 한 최선의 글쓰기는 다시 쓰기다. 인부가 되어 보도블록 교체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해보자. 야간이고 조명은 고장 나서 무척 어둡다. 보도블록 위에 얼룩이 좀 신경 쓰이긴 했지만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모양에 맞게 잘 짜넣었다. 아침이 되어보니 반장이 무슨 일을 이렇게 했냐며 막 화를 낸다. 알고 보니 보도블록 위의 얼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예쁘게 그려진 문양이고 이 문양에 맞춰 보도블록을 채워 넣었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두 가지 해결 방법이 있다. 하나는 블록을 두 개 빼내 각각 교체해가면서 퍼즐 풀이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보도블록을 뽑아 문양에 맞게 새로 꽂는 것이다. 다시 쓰기는 이 두 번째 방법을 말한다.
많은 경우 다시 쓰기는 효용이 좋다. 나는 단편소설을 쓸 때 꽤 자주 다시 쓰기를 한다. 아이디어 자체가 독특하거나 글의 다른 부분에서 부각되는 요소가 있어 단순한 플롯이어야 하는 경우엔 한 호흡으로 글을 쓰길 선호하지만, 반대로 글을 이루는 요소들이 그렇게까지 특이하지 않다면 날것 그대로의 글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보다 좀 더 어렵고 복잡한 도전을 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쓰기는 이 어렵고 복잡한 도전을 위한 최선의 수다. 그런데 웹 소설을 쓰는 경우에는 이 방법이 그렇게까지 우수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시 쓰기를 하기 위해서는 끝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이 작업에 쓰일 모든 보도블록이 이미 내게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보도블록 위에 그려진 모든 문양을 확인하고 전체 그림을 상상해본 다음 어디가 바깥쪽에 있고 어디가 안쪽에 위치할 것인지 알고 있어야지 제대로 작업할 수 있다. 반면에 웹 소설은 아주 커다란 보도블록을 배치하는 작업을 맡는데, 보도블록 위의 문양이 어두워서 얼룩으로만 보일 뿐인데다 아직 보도블록이 다 전달되지도 않은 상태다. 보도블록이 모두 깔렸을 때 문양이 연결되어 어떤 그림이 될 것인지 전혀 알 수 없다.
한 권, 그리고 또 두 권 분량의 글을 ‘다시 쓰’다가 그전 해에 신청한 호텔 프린스에 들어가게 된 참이었다. 나는 바닥에 머리를 박고 기어 다니면서 각각의 문양을 더듬어보며 어렴풋하게라도 이 소설이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지를 가늠해보려고 했다. 더 나은 글이 되어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었기 때문에 나는 답이 없는 문제에 매달려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나는 정답인지 오답인지 확신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단지 그럴 수 있다, 도전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쓴 글을 지웠고 그 결과가 마이너스 5만 자였다. 정확히는 10만 자가량 쓰고 15만 자가량 지웠다. 호텔 프린스에서 새롭게 쓴 버전보다 이전 버전을 다소 고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스티븐 킹의 말대로 ‘초고는 언제나 쓰레기’인가? 사실 다시 쓰기를 비롯해 수정 그 자체도 큰 의미가 없다는 견해도 있다. 이를테면 아시모프의 경우 손으로 글을 쓴 뒤 타이핑할 때 거의 수정하지 않았고, 스칼지는 모두 머릿속에서 구상을 끝낸 뒤 단번에 글을 쓰기 때문에 수정이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관행이 모든 작가에게 적용되진 않는다고 말했다. 그 또한 맞는 말이다. 만 명의 작가가 있으면 만 개의 작법이 있을 것이다. 새삼스럽지만 웹 소설 작가들이 모두 언제나 쓰레기인 초고를 연재하는 작가들이다. 아마 스티븐 킹은 깜짝 놀라지 않겠는가?
언젠가 단편소설 하나를 썼었는데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단편집에 글을 실으면서 다시 쓰기를 했다. 이렇게 a와 b 두 가지 버전이 생겼기에 이전에 a를 보았던 이들에게 b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많은 이들이 a가 더 낫다거나 그다지 바뀐 게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처음부터 완전히, 그러니까 같은 문장은 단 한 문장도 없는데 그랬다. 심지어 플롯이나 등장인물도 겹치지 않고, 같은 장면조차도 없었다. 세부만 따지자면 법적으로는 a와 b를 비교했을 때 서로를 표절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난 버전 b를 읽고 a가 더 낫거나 그다지 바뀐 게 없다는 이야기를 한 사람들이 잘못된 감상을 했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사람들은 이미 a를 보았기 때문에 b를 읽을 때 a에 대한 기억이 잔상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오염된 감상이다. 같은 사람에게 서로 다른 소설을 읽히는 실험은 불가능하므로 이런 실험을 통해 다시 쓰기가 필요한지 필요 없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는 어떤 의의를 가지고 있다. 소설 내부의 이야기, 플롯, 아이디어가 동일하다면 그것을 어떻게 꾸미더라도 다르지 않게 느껴질 수는 있다는 것이다. 그럼 초고를 베이스로 작가가 손을 댄다면 무엇을 고칠 수 있는가? 나는 완전히 다시 써도 결국 무언가를 남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한다.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대단한 눈썰미로 천 개의 깨진 항아리 조각 위에 서 있는 사람은, 객관적으로 항아리를 만든 사람이 아니라 항아리를 깬 사람이다. 그 자체가 퍼포먼스라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정은 더 나은 글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불가하며 초고가 그냥 작가의 한계일 가능성도 있다.
나는 웹 소설 강의에서 실제로 그렇게 가르친다. ‘웹 소설은 매일 한 편을 써야 하기 때문에 쓰고 고치거나 쓰면서 고치는 것 모두 허위의 작업이다. 작가 스스로 더 낫다고 판단하는 일이 정말로 더 나은 글이 되리란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초고가 전부다. 최선의 글은 명백한 답이 없는 반면에 마감에는 답이 있다. 계속해서 글을 쓰다 보면 더 좋은 작가가 된다. 좋은 글을 쓰려고 하지 말고 좋은 작가가 되면, 절로 좋은 글을 쓰게 된다.’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위래
2008년 동인지 『첫 번째 비상』에 단편 「아래에서」를 싣고, 2년 뒤 네이버 오늘의 문학에 「미궁에는 괴물이」를 게재하며 첫 고료를 받았다. 이후 여러 지면에서 장르 소설과 웹 소설을 썼다. 소설집 『백관의 왕이 이르니』, 경장편 『허깨비 신이 돌아오도다』를 출간했으며, 웹 소설 『마왕이 너무 많다』와 『슬기로운 문명생활』를 완결했다. 브릿G 제2회 종말문학상공모전에서 「죽이는 것이 더 낫다」로 당선을, 제11회 SF어워드 중단편 부문에서 「두 발로 걷는 남자 괴담」, 제12회 SF어워드 중단편 부문에서 「마젠타 C. 세레스의 사랑과 혁명」으로 각각 우수상을 수상했다. 현재 리디북스에서 『무능한 마법사의 무한회귀』를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