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지 않을 결의
강도진은 무협지를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면, 싸움이 끝난 뒤의 허무한 문장보다 그 싸움이 시작되기 전의 무거운 고뇌를 좋아했다. 검이 부딪히기 전까지의 선택들,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길에서 왜 물러서지 않았는지, 손해를 알면서도 왜 등을 돌리지 않았는지. 도진을 붙잡는 건 언제나 그 지점이었다.
“이 검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지켜야 할 이들을 위한 것이다.”
도진은 그런 결의가 오래 남는 편이었다. 그는 늘 그 페이지에서 고뇌했다. 결말보다 책임이, 승패보다 태도가 궁금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오래된 무협지 한 권을 읽다 말고, 도진은 책갈피를 꽂았다. 주인공은 자신이 입을 피해를 뻔히 알면서도, 단 한 명의 동료를 위해 만인이 기다리는 사지로 걸어 들어갔다.
“내가 이 길을 가지 않으면, 나의 세상이 무너진다.”
도진은 그 문장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나의 세상’이라는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것은 이기적인 욕심이 아니라, 자신이 발붙이고 서 있는 환경과 사람들에 대한 지독한 책임감이었다.
도진은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지금 내 세상을 위해 무엇을 포기하고 있는가. 왜 이 문장이 이토록 아프게 박히는가.
그는 책을 덮고 창밖을 보았다. 특별할 것 없는 저녁이었다. 차가 지나가고, 신호등이 바뀌고, 누군가는 통화하며 웃었다. 강호도, 검도 없는 세상인데 이상하게 이 세계가 더 버거웠다.
무협 속 인물들은 명확했다. 손해를 보더라도 지켜야 할 결의, 결코 꺾이지 않는 결심.
반면 도진의 세계는 늘 흐릿했다. 유리한 길을 택하면 비겁해지고, 정직하게 살려 하면 소중한 것들을 잃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무협지를 읽었다. 그것은 단순한 독서가 아니라, 흔들리는 자신의 결심을 다잡기 위한 수련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도진은 책을 읽는 방식이 달라졌다. 도진의 시선은 화려한 초식 위를 미끄러져 내려가, 인물이 손해를 감수한 채 홀로 남겨진 문장 끝에 오래 머물렀다. 그 고통스러운 과정 속에서 어떤 결의를 다지는지를 보았다. 그는 깨달았다. 무협의 진짜 교훈은 승리가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가치를 끝까지 책임지는 태도에 있다는 걸.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주변을 지키는 결정,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나아가는 결심. 그 장면마다 인물들은 이전보다 단단해졌다. 도진은 거기서 자신의 논어를 하나 적어 내려갔다.
강해지는 것보다, 내 사람들을 지켜낼 자격을 갖추는 것이 먼저다.
그 문장은 이후로 그의 기준이 되었다. 회사에서 부당한 이익을 제안받았을 때, 소중한 이를 위해 자존심을 꺾어야 할 때, 도진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 이건 나를 위한 싸움인가, 아니면 내가 책임져야 할 이들을 위한 결심인가.’
항상 정답은 없었지만, 적어도 그는 비겁하게 도망치지는 않게 되었다. 무협지 속 고수들은 늘 말이 적었다. 도진은 그 점도 흥미로웠다. 강한 인물일수록 설명하지 않았고, 변명하지 않았고, 설득하지 않았다.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사람은 타인에게 변명하지 않으니까.
결심은 소란스럽지 않다. 다만 묵묵히 행할 뿐이다.
그날 이후 도진은 말수를 줄였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결심을 행동으로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은 그를 오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도진은 그 오해를 바로잡으려 애쓰지 않았다.
강호에서 자신의 진심을 일일이 설득하는 고수는 없다는 걸, 그는 이미 책에서 배웠으니까.
어느 날, 서이수가 그의 책장을 보고 물은 적이 있다.
“왜 이렇게 무협지가 많아요?”
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읽다 보면, 제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조금은 명확해지거든요.”
사실 그는 여전히 매일이 두려웠다. 다만, 자신이 피해를 보더라도 지켜야 할 무언가가 생겼을 때, 그걸 포기하지 않을 결의 하나쯤은 가슴에 품게 되었다.
그날 밤, 도진은 또 다른 책을 펼쳤다. 이번엔 주인공이 마지막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모든 걸 내던지는 이야기였다. 마지막 문장은 이랬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으나, 자신만은 잃지 않았다.”
도진은 조용히 책을 덮었다. 그리고 마음속에 마지막 문장을 하나 더 적었다.
"나를 책임지는 것은, 결국 내가 선택한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아직 고수가 아니었으며, 여전히 많은 것을 손해 보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내였다. 하지만 적어도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는 확실히 알았다.
세상의 풍파 속에서도 자신과 자신의 환경을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
강도진은 그렇게 자신만의 무협을, 자신만의 논어를 하루씩 써 내려가고 있었다.
"노트 귀퉁이에 차마 적지 못한 내 시린 밤의 기록들이 거기 있습니다. 그저 묵묵히, 내 뒤를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마지막 계절이 지나 당신이 있었다] 첫 회부터 정주행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