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진다는 건 책임질 자격을 갖추는 것
도진이 요즘 다시 펼쳐 든 건 [화산귀환]이었다.
모두가 승리라고 말하는 순간에도, 누군가는 그 승리가 남긴 잔해를 본다. 십만대산의 정상에서 천마의 목을 베고 영면했던 청명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를 맞이한 것은 천하제일검의 영광이 아니라 철저히 무너져 내린 화산의 폐허였다.
정확히 말하면, 청명은 도망칠 수도 있었다. 백 년의 시간을 건너뛴 그는 이제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존재였다. 그 압도적인 무학이라면 강호 어디에서든 대접받으며 편히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구태여 그 가파른 화산의 절벽을 다시 기어 올라갔다.
“망했으면 살려야 하는 게 인지상정. 누구 맘대로 내 화산이 망해?”
도진은 청명의 이 날 선 독설 속에서 지독한 부채감을 읽는다. 그것은 과거의 자신이 조금만 더 세심했더라면, 사형들의 말을 조금만 더 귀담아들었더라면 소중한 이들을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라는 후회다. 그는 자신이 피해를 보고 손해를 입더라도, 그 무거운 책임을 다시 짊어지기로 결심한다.
청명이 아이들을 혹독하게 굴리는 이유는 그들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자신이 사라진 뒤의 세상에서도 그들이 스스로를 지키고, 그들의 환경을 책임질 수 있는 '힘'을 길러주기 위함이다. 그 과정에서 청명은 기꺼이 악역을 자처하고, 자신의 안락함을 포기한다.
나를 책임진다는 말이, 결국 내가 선택한 가치를 끝까지 붙드는 일이라는 걸.
도진은 이 대목에서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다. 화려한 검술보다 그 싸움을 지속하게 만드는 결심에 마음이 머문다. 청명에게 화산은 단순히 문파가 아니라, 그가 끝까지 책임지기로 선택한 '자신의 세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마흔의 길목에서 다시 읽는 무협은 더 이상 판타지가 아니다. 현대라는 강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저마다의 화산은 있다. 누군가에게는 무너져가는 가정의 조각들일 수도, 기어코 지켜내야 할 사랑하는 이의 미소일 수도, 혹은 내가 몸담은 이 작고 초라한 조직의 미래일 수도 있다.
피할 수 있었던 길이 있었다는 걸, 도진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물러서지 않은 선택들. 손해라는 걸 알면서도 등을 돌리지 않았던 순간들. 그는 늘 그 지점에서 오래 머물렀다.
손해를 알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것, 내가 무너짐으로써 주변을 지탱하는 것. 도진은 청명의 거친 행동 뒤에 숨겨진 그 서늘하고도 뜨거운 결의를 보며, 자신의 논어에 새로운 문장을 적어 넣는다.
몰락한 문파, 사라진 이름, 돌아왔지만 환영받지 못하는 자리. 이 소설은 시작부터 도망칠 수 있는 이유를 충분히 제공한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물러서지 않는다. 피할 수 있었던 싸움에 굳이 뛰어들고, 손해가 뻔한 선택을 감수한다. 도진이 이 이야기를 붙잡고 있는 이유는 분명했다. 검이 오가는 장면 때문이 아니었다.
왜 그 싸움을 선택했는지, 왜 도망치지 않았는지, 왜 끝까지 책임지려 했는지. 그 결의와 결심이, 이상하리만큼 지금의 자신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도진에게도 그런 화산이 있다. 한때는 굳건하다고 믿었던, 그래서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자신의 가정이다. 벽은 서 있었고 지붕도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안쪽의 기둥은 이미 오래전부터 썩어가고 있었다. 도진은 그것을 몰랐다기보다, 보지 않기로 선택했다. 무너지지 않는 집이라는 믿음이 그를 버티게 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정이 무너지면, 그 위에 세운 자신의 선택과 책임까지 함께 무너질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그는 계속 살아냈다. 아무 일도 없다는 얼굴로, 괜찮다는 말로, 이미 금이 간 바닥 위를 조심스럽게 걸으면서.
[화산귀환] 속 화산파는 한때 완전히 무너진 문파다. 이름만 남았고, 사람들은 비웃었으며, 다시 일어설 거라 믿는 이는 없었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도망치지 않는다. 다시 쌓아 올리는 길이 고통스럽다는 걸 알면서도, 무너진 자리를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도진은 그 태도가 좋았다. 강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소설은 계속해서 묻고 있었다.
강도진의 논어 01
“강함은 내가 선택한 세상을 끝까지 책임지는 힘이다.”
도진은 책을 덮지 않았다. 오히려 더 천천히 넘겼다. 마치 이 이야기가 끝나면, 자신도 무언가를 선택해야 할 것 같아서. 무너진 집을 그대로 둘 것인지, 아니면 썩은 기둥을 인정하고 다시 짓기 시작할 것인지.
"나를 위해서가 아닌 너희들을 위해 다시는 무너지지 않는 기둥을 세우겠다."
화산은 한 번 꺼지면 끝이 아니다. 재는 쌓이고, 열은 남는다. 다시 타오를 준비를 하고 있을 뿐이다. 도진은 아직 확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안다. 피하지 않았던 선택들이, 언젠가는 자신을 다시 서게 만들 거라는 걸.
비록 지금 손에 든 것이 녹슨 검 한 자루뿐일지라도, 내가 이 자리를 지키기로 결심한 이상 이곳은 다시 나의 강호가 된다. 도진은 이제 안다. 진짜 고수는 승패에 연연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끝까지 지켜내는 자라는 것을.
그리고 그 첫 불씨는, 지금 이 페이지 위에서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노트 귀퉁이에 차마 적지 못한 내 시린 밤의 기록들이 거기 있습니다. 그저 묵묵히, 내 뒤를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마지막 계절이 지나 당신이 있었다] 첫 회부터 정주행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