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무게를 나누는 법

수치심의 벽을 허물고 스며든 달콤한 위로

by 아를밤

‘무례하다, 참으로.’

그의 미소를 마주칠 때마다 부러움보다 먼저 고개를 드는 건 반사적인 거부감이었다. 나는 수만 번의 성찰을 겹겹이 쌓아 올려야 겨우 나를 지킬 수 있었는데, 이 남자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 모든 과정을 생략한 듯 보였다. 사유의 성벽을 돌 하나 건드리지 않고 넘는 태도. 그 가벼움이 얄미웠다.

필사적으로 걸어 잠근 내 수치심의 문 앞에, 아무런 통행증도 없이 환한 빛을 밀어 넣는 무례함. 마치 내가 숨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그 해사함이, 나는 견딜 수 없이 얄미웠다.

그래서 차라리 보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보지 않으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데 그는 그 미소를 매번 나에게 들이댄다.

‘역시 무례하다, 참으로.’


사실 방금 전까지 이수는 죽을 맛이었다. 행정복지센터의 그 좁고 건조한 공기,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서류들, 익숙한 전조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심장이 요동치고 폐부 깊숙한 곳까지 산소가 닿지 않는 기분. 손끝이 저릿해지며 세상의 소음이 멀어지는, 공황의 그림자가 발밑까지 드리워진 순간, 도진의 너스레 섞인 웃음기가 그 어둠을 강제로 걷어냈다.

도진의 얼굴은 여전히 말도 안 되게 환했다. 이수가 필사적으로 숨기려 했던 수치심도, 그녀를 질식시키려던 공포도 저 무방비한 웃음 앞에서는 맥을 못 추고 증발해 버리는 것 같았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남들이 볼까 봐 봉투 속에 쑤셔 넣고 싶던 '정부 지원품' 상자를 양손 가득 들고서, 그는 마치 로또라도 당첨된 사람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의 웃음은 "이게 뭐 어때서?"라고 툭 던지는 가장 무심한 처방전이었다.

덕분에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이수의 방어기제는 허무하게 무너졌고, 조여오던 가슴팍에 아주 미세한 틈이 생겼다. 그 틈으로 비로소 시원한 공기가 한 모금 스며들었다.


"...이수 씨? 제 말 들리세요?"

도진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수의 눈앞에서 손을 휘휘 저었다. 그녀는 그제야 끊겼던 현실의 흐름을 퍼뜩 붙잡았다. 횡단보도의 신호등은 이미 초록불로 바뀌어 있었다.

"아, 네. 죄송해요. 잠시 딴생각을..."

"가자고요. 신호 바뀌었어요."

도진은 턱짓으로 건너편을 가리키며 엉겁결에 서 있는 이수의 손에서 상자를 쓱, 낚아챘다.

"이리 줘요. 손목 나가요. 저 천마(天魔)라서 힘 셉니다."

거절할 틈도 없었다. 하지만 거절하고 싶지도 않았다. 묵직한 상자가 사라진 자리에 도진의 온기가 스쳤고, 이수는 그 온기에 기대어 겨우 발을 내디뎠다.

손이 가벼워지니, 마음을 짓누르던 돌덩이도 조금은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짓누르던 수치심이 묘한 안도감으로 변하는 걸 느끼며, 이수는 조심스럽게 그의 옆으로 다가서서 물었다.

"저기... 안 무거우세요? 양손에 그 무거운 걸..."

"무겁죠. 근데 기분은 좋은데요? 혼자 들면 짐인데, 같이 들면 선물이잖아요. 우리 같은 거 받았으니까."

'같은 거.'

그 짧은 단어가 이수의 가슴을 툭, 건드렸다. 세상 사람들은 다 가족들과 행복해 보이는데 나만 혼자 짐을 짊어진 채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았던 날들.

그런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저, 사실 이거 받으러 올 때마다 좀 뻘쭘했거든요. 남자 혼자 와서 받아가는 거, 다들 쳐다보는 것 같고. 근데 오늘은 동지가 있으니까 든든하네요. 쪽팔림도 나누면 반이라던데."

이수도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쪽팔림을 나누다니. 살면서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봤다.


어느새 두 사람은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섰고, 익숙한 207동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도진이 짐을 내려놓으며 붉어진 얼굴로 숨을 골랐다.

"감사해요. 진짜 무거우셨을 텐데..."

"에이, 천마 체면에 이 정도쯤이야. 아, 그런데 이수 씨."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려던 이수의 귓등 위로 도진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뒤를 돌아보니 그가 머뭇거리다 주머니를 뒤적여 사탕 하나를 꺼내 그녀의 손바닥에 올려두었다.

"가서 드세요. 당 떨어지면 손님들한테 웃음 안 나오거든요. 제가 해봐서 압니다."

손바닥에 남은 사탕의 온기보다, 이수의 고단함을 알아주는 그의 눈빛이 더 뜨거웠다.

그가 다시 몸을 돌려 가려나 싶던 찰나, 쑥 하고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저기, 이수 씨. 우리 같은 아파트 주민이고, 애들도 비슷한 또래고... 또 아까 말한 '동지'기도 하잖아요.

번호 좀 알려주실래요? 혹시 알아요? 나중에 식용유 모자라면 빌리러 갈지."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하지만 그 뻔한 농담이 이수의 남은 벽을 완전히 허물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그의 폰을 받아 자신의 번호를 입력했다.

'서이수' 세 글자를 적어 넣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텅 비어 있던 연락처 목록에, '천마'라는 말도 안 되는 이름으로 불쑥 찾아온 이 남자가 자신의 삶에 어떤 균열을 낼지, 이수는 두려우면서도 조금 궁금해졌다.

"저장했습니다. 저는 강도진이에요. 아, 천마(天魔)라고 저장하셔도 되고요."

그는 다시 무심한 얼굴로 무장하며 손을 흔들고 204동 쪽으로 걸어갔다. 아파트 입구로 길게 늘어진 두 사람의 그림자가 잠시 겹쳤다 떨어졌다.

이수는 자꾸만 느려지는 자신의 마음을 굳이 다잡지 않은 채, 손바닥 안의 사탕을 꽉 쥐었다. 이 달콤하고 단단한 위로가, 오늘 하루를 버티게 할 유일한 힘이 될 것 같았다.



단단히 걸어 잠근 문틈으로 뜻밖의 햇살이 비집고 들어옵니다. 나만 알고 있던 그늘을 누군가 무심하게 툭, 건드려줄 때 비로소 팽팽했던 긴장이 맥을 놓습니다. 손바닥에 남은 작은 온기를 가만히 쥐어보며, 오늘 하루가 참 무사하다고 생각하는 밤입니다.

"단거 먹으면, 기분 좋아져요."


이전 03화3. 식용유와 동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