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소음이 잠든 뒤에야 비로소 쉬어지는 숨
집으로 돌아온 도진은 평소보다 훨씬 분주했다. 아이들을 씻기고 저녁을 먹이는 내내 시선은 식탁 위에 놓인 휴대폰으로 향했다. '서이수' 세 글자가 적힌 연락처를 띄워놓고, 그는 수십 번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마침내 전송 버튼을 눌렀을 때. 손바닥은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이수 씨, 저 도진이에요. 오늘 저녁 8시쯤 백운호수 산책 어떠세요? 밤공기가 꽤 좋거든요.]
전송 완료. 도진은 침을 꿀꺽 삼키며 답장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 화면 속 숫자 '1'이 사라졌다.
하지만 5분, 10분이 지나도 진동은 울리지 않았다. 읽었는데 답이 없다. 침묵은 생각보다 무거웠고, 도진의 심장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 시각, 이수는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자판 위에 올린 손가락은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저녁 8시, 백운호수, 산책, 그리고... 낯선 남자.'
그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흩어졌다. 8시의 백운호수는 이수에게 산책로가 아니었다. 화려한 조명 아래 쏟아지는 인파, 사방이 트여 도망칠 곳 없는 개활지. 그곳은 지뢰밭이었다.
이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거절해야 한다는 이성이 비명을 질렀지만,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이 인연을 놓쳐버리면, 다시 혼자만의 문장 속으로 숨어버릴 것 같았다.
도진의 방 안은 초조함이 독처럼 퍼지고 있었다. '읽었는데 왜 연락이 없을까. 역시 내가 너무 앞서 나갔나?'
자책하며 방 안을 서성이던 도진의 머릿속에 문득 키즈카페에서의 이수가 떠올랐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숨을 몰아쉬던 그 위태로운 모습. 순간 도진은 아차 싶었다.
그녀는 지금 무시하는 게 아니라, 저 건너편에서 길을 잃고 떨고 있는 것이다. 도진은 서둘러 다음 메시지를 적어 내려갔다.
[아! 이수 씨! 제가 일정을 착각했네요. 8시는 좀 힘들 것 같고... 혹시 늦은 시간도 괜찮으시면 밤 11시는 어떠세요? 그때가 사람도 없고, 제가 유일하게 육퇴하고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시간이라서요!]
휴대폰 진동에 이수가 흠칫 놀라 화면을 확인했다. 밤 11시. 세상의 소음이 잠든 시간.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오직 두 사람만의 공간. '8시는 무섭지만, 11시라면...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아.' 이수의 굳어있던 손가락이 마침내 자판 위를 움직였다.
[...네. 11시라면 괜찮을 것 같아요. 호수 앞에서 뵐게요.]
밤 11시, 백운호수의 산책로는 조명이 물결 위로 부드럽게 번지고 있었다. 호숫가에 들어서는 이수의 발걸음은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폐부 깊숙한 곳에는 아까 전 느꼈던 긴장의 잔재가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하지만 저 멀리 가로등 아래 서 있는 도진을 발견한 순간, 거짓말처럼 숨통이 트였다. 아직 도진의 보폭에 맞춰 걷기도 전이었다. 그저 밤바람에 가볍게 일렁이는 그의 얇은 셔츠 자락과 무해한 옆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그녀를 옥죄던 가시들이 눈 녹듯 사라졌다.
"와... 밤에 오니까 정말 예쁘네요!"
이수의 입에서 터져 나온 탄성은 스스로를 향한 선언이기도 했다. 이제 괜찮다는 확신. 이수는 환하게 웃으며 도진보다 한 발 앞서 걸어 나갔다. 가로등 조명을 등지고 선 이수의 웃음에 도진은 잠시 말을 잊었다.
'아, 이건 반칙인데.'
서늘한 얼음 조각 같던 여자가 무장해제되어 보여주는 그 압도적인 생동감. 멈춰버린 심장 너머로 그녀를 지켜주고 싶다는 위험한 욕심이 고개를 들었다.
"이수 씨, 그렇게 좋아요?"
"네! 저 사실 밤에 이렇게 여유롭게 걸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거든요. 맨날 아이들 뒤꿈치만 쫓아다니느라 바빴는데..."
이수는 대답 대신 도진을 향해 배시시,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근데 도진 씨, 아까 일정을 착각하셨다면서요. 잘 해결된 거예요?"
도진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거짓말의 대가를 치를 시간이었다.
"그게... 저희 집 애들이 갑자기 젓가락으로 칼싸움을 하다가 밥상을 엎는 바람에! 밥알이 사방팔방으로 튀어서... 하하하!"
누가 봐도 앞뒤가 안 맞는 어설픈 변명이었다. 이수는 직감했다. 그의 어설픈 변명이 숨을 쉴 공간을 만들어주려는 배려였음을.
이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피식, 소리 내어 웃었다.
"도진 씨는 참... 거짓말 못 하시네요. 고마워요, 11시에 만나자고 해줘서."
"근데 도진 씨.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도진 씨는 어떻게 그렇게 매번 아무렇지 않게 웃으세요?"
이수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그건 도진을 향한 공격이라기보다, 단 한 순간도 긴장을 놓지 못하는 자신을 향한 자조에 가까웠다. 도진은 호수의 먼 곳을 응시하며 잠시 침묵했다.
“어차피 우리가 짊어진 짐, 인상 쓴다고 가벼워지진 않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기운 좀 빼기로 했어요. 내가 먼저 힘을 빼야 짐도 기운이 빠져서 덜 무거워지는 것 같거든요.”
이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도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말속에는 삶의 풍파를 온몸으로 다 맞고, 몇 번이고 꺾였다가 다시 일어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한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수천 번 곱씹었던 <논어>의 구절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방금 도진이 뱉은 투박한 일상어가 이수의 가슴을 더 깊게 후벼팠다.
“도진 씨는 참… 이상한 사람이에요. 제가 책 속에서 그렇게 찾으려 애썼던 답을,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실천하고 계시니까요.”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집중하기. 그거 하나만 잘해도 오늘 하루는 성공이거든요.”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갓 구운 빵처럼 따뜻했다.
이수는 처음으로, 이 낯선 남자가 주는 안정감에 오롯이 몸을 맡겨보고 싶었다.
세상의 소란이 빠져나간 자리에 오직 투명한 숨소리만 남습니다. 내 속도를 앞질러 가던 세상이 멈추고, 누군가 기어이 내 보폭에 맞춰 나란히 서 줄 때 비로소 가슴팍에 시원한 바람이 듭니다. 텅 빈 길 위에서 마주한 온기가 어둠보다 깊은 안심을 선물하는 그런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