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식용유와 동지

같은 무게의 짐을 나누어 든 시간

by 아를밤

행정복지센터의 공기는 건조했다. 민원대 앞은 번호표 기계의 띵동 소리로 분주했고, 도진은 익숙하게 '복지행정팀' 창구로 향했다. 명절마다 나오는 ‘한부모 가정 지원 물품’을 받기 위해서였다.

생필품 하나가 아쉬운 형편에 회사 눈치를 보며 낸 반차였다. '도윤이는 햄 좋아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공황 토끼?'

어제 서점에서 <논어>를 읽던 그녀, 이수였다.


도진의 눈이 커졌다. 그녀였다. 여기서 다시 마주칠 줄이야. 이 동네가 좁다 싶었지만, 이런데서 마주칠 줄은 몰랐다. 그 순간, 담당 주무관의 목소리가 도진의 귀에 또렷하게 들려왔다.

"서이수 님, 여기 한부모 가정 지원 물품입니다. 무거우니까 조심히 들고 가세요."

도진은 순간 멍해졌다. 가슴 한가운데를 꽉 조이고 있던 벨트가 스르르 풀리는 기분. <논어>를 읽던 고상한 그녀와 자신 사이의 거대한 벽이, '한부모'라는 단어 앞에서 허망하게 허물어졌다.

그녀는 완전한 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비슷한 무게의 짐을, 다른 방식으로 들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수가 상자를 받아 들고 몸을 돌리다 도진과 눈이 마주쳤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 그녀는 어색한 목례만 남긴 채 도망치듯 밖으로 나갔다.


하필이면 이곳에서. 이런 모습으로. 저 남자에게 들키다니.

"어, 저기...!"

도진이 그녀를 잡으려는데, 눈치 없는 주무관이 도진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어? 서윤이 아버님 오셨네요! 여기 장부에 서명 먼저 —"

도진은 속이 타들어 갔다. 지금 안 쫓아가면 또 놓친다. 이번엔 절대 놓칠 수 없었다. 그는 주무관이 내미는 볼펜을 낚아채듯 쥐고 장부에 이름을 휘갈겼다.

"여기요! 물건 바로 주세요!"

"아이고, 성격도 급하셔라. 이번엔 식용유 세트라 좀 무거워요. 봉투 드릴—"

"아뇨! 괜찮습니다! 수고하세요!"

도진은 주무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자를 한 손에 거머쥐었다.

마음이 급했다. 아니, 거의 전력 질주였다.


행정복지센터 자동문을 박차고 나서자, 저 멀리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이수의 뒷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신호등은 빨간불이었다. 도진은 숨을 고를 새도 없이 그녀를 향해 뛰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달려서인지, 아니면 드디어 그녀에게 다가갈 명분이 생겨서인지 알 수 없었다.

도진은 그녀의 뒤에 멈춰 섰다. 그리고 최대한 숨을 고르며, 태연한 척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하지만 손에 들린 커다란 '식용유 세트'가 그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이수 씨."

이수가 놀란 토끼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도진은 자신의 손에 들린 상자를 들어 보이며, 세상에서 가장 뻔뻔하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무겁지 않아요? 우리 같은 거 받은 것 같은데."

이수는 당혹감에 어안이 벙벙한 채 도진을 바라보았다. 수치심에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도진은 마치 보물상자라도 들고 있는 사람처럼 해맑았다. 도진은 이수가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의 상자를 자연스럽게 뺏어 들었다.


"이수 씨도 여기 사셨네요? 저는 204동 사는데. 부모님 모시고 애 둘 키우려니 정신없어서 이런 혜택은 빠지지 않고 챙기는 편이거든요. 그냥 평범한 직장인이라 이런 거라도 아껴야죠."

도진의 넉살 좋은 자기소개에 이수의 팽팽하던 긴장감이 툭, 하고 끊겼다. '부모님'과 '애 둘'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마음속 빗장을 건드린 탓이다. 식용유 한 세트가 절실한 '진짜 자신'을 들킨 순간, 이상하게도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저도... 부모님이랑 같이 살아요. 207동이에요."

"어쩐지! 진짜 동지가 맞았네. 이수 씨는 무슨 일 하세요? 사실 저는 오늘 이거 수령하려고 부득이하게 반차를 썼거든요. 어제는 아들놈 치과 진료 때문에 연차 내고 서점 갔다가 이수 씨를 본 거였고요."

도진의 솔직한 고백에 이수의 눈매가 조금 부드워졌다. 그 역시 자신처럼 여유라고는 쥐어짜야 겨우 나오는 삶을 살고 있다는 동질감 때문이었다. 초록불이 켜지자 두 사람은 나란히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아울렛에서 여성복 매장 운영해요. 20살에 동대문 들어가서 배운 게 이 일이라... 요즘은 경기가 너무 안 좋아서 딱 인건비 정도만 남아요. 그래서 쉬지도 못하고 매일 나가요. 쉬면 마이너스니까."

"매일요? 세상에, 그럼 애들은요?"

"아홉 살, 열 살 딸 둘인데... 어릴 때부터 좀 강하게 키웠어요. 엄마가 바쁘니까 자기들끼리 밥 챙겨 먹고 집안일도 거들고 그래요. 안 그러면... 제가 못 버티겠더라고요."


말 끝을 흐리는 이수의 목소리에 물기가 뱄다. 도진은 숙연해졌다.

고상하게 책을 읽던 그녀의 단정한 손 뒤에 숨겨진, 아울렛 매장의 먼지와 장사꾼의 고단한 세월이 이제야 보이는 듯했다.

"이수 씨도 참 치열하게 사시네요. 저희 집도 만만치 않아요. 아버지는 늘 예민하시고, 어머니는 회사 일이 밤 9시에나 끝나시거든요. 저도 아침에 애들 등교시키고 부랴부랴 출근했다가, 6시 퇴근하면 애들 하원 시간에 맞춰서 미친 듯이 차 몰고 달려와요. 누구 하나 기댈 곳 없는 게 꼭 외줄 타기 하는 기분인데, 그래도 어쩌겠어요. 제가 안 움직이면 집이 굴러가질 않아서요."

도진의 말에 이수가 멈칫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너무나 닮은 삶의 자국. 서로의 '밑바닥'을 확인한 순간, 수치심은 사라지고 묘한 끈끈함이 그 자리를 채웠다.

"이수 씨, 우리 진짜 보통 인연은 아니네요. 짐도 같고, 사는 형편도 비슷하고. 심지어 아파트 단지도 같고."

도진이 씩 웃으며 양손에 든 식용유 상자를 고쳐 잡았다. 이수는 처음으로 누군가의 미소가 부러운 것이 아니라, 곁에 있어 든든하다고 생각했다. 늘 혼자 짊어져야 했던 삶의 무게를 아주 잠시나마 누군가와 나누어 든 기분이었다.

"가요, 동지. 207동까지 천마(天魔)가 안전하게 배달해 드릴게."



단정하게 빗어 넘긴 일상 너머로 숨겨온 생의 무게를 들키고 맙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같은 짐을 나누어 든 뒷모습을 보며 비로소 참았던 숨을 내뱉습니다. 혼자 짊어지는 것이 당연했던 길 위에서, 처음으로 누군가와 보폭을 맞춰보는 그런 저녁입니다.

"당신이 있어서 식용유 상자가 가벼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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