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공자님과 천마(天魔)님

마음이 체하지 않게, 가끔은 비워두기

by 아를밤

평일 낮의 대형 서점은 고요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도, 생활의 소음도 차단된 이곳은 이수에게 유일한 피난처였다. 이수는 인문학 코너 구석에 서서 <논어>를 읽고 있었다.

'군자는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입안으로 문장을 굴려보았다. 그녀는 늘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흔들리는 건 자신이 부족해서라고, 더 깊이 사색하고 성찰하면 고통을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고통조차 고상하게 승화시켜야 한다는 강박이 그녀를 더 옥죄고 있었다.


그때였다. 책장 너머로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며칠 전 키즈카페에서 자신을 구해줬던 남자, 도진이었다. 그는 서가에 기대어 책 한 권을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정독하고 있었다. 마치 우주의 진리라도 탐구하는 듯한 엄숙한 표정.

'저 사람도... 나랑 비슷한 부류인가?'

이수는 내심 반가움을 느꼈다. 분명 그도 삶의 고뇌를 다루는 철학 서적을 있으리라. 이수는 그가 읽는 책의 제목을 확인하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 절대검제(絶代劍帝) 14권 : 혈교의 귀환 ]

"...?"

이수의 눈썹이 꿈틀했다. 명백한 판타지 무협 소설이었다. 순간, 이수의 마음속에서 차가운 판단의 회로가 돌아갔다.

'고작... 무협지?'

실망감이 밀려왔다. 자신은 이 고통 속에서 답을 찾으려 공자의 말씀을 파고드는데, 저 남자는 귀한 시간에 허무맹랑한 칼싸움 이야기나 읽고 있다니. 깊이 없는 사람들은 매력이 없다. 이수는 자신이 도달하지 못한 평온을 저 남자가 '가벼움'으로 얻어냈다고 단정 지으며 비겁한 위안을 삼았다.


사실 도진은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숨을 멈춘 상태였다. 이름을 몰라 마음대로 붙인 별명 '공황 토끼'. 키즈카페에서 봤을 때보다 혈색은 좋아 보였지만, 여전히 부서질 듯 위태로운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그리고...

'젠장, 예쁘네.'

도진은 들고 있던 책 모서리로 자신의 허벅지를 쿡 찔렀다. 정신 차려라, 강도진. 네 주제에 무슨.

거울을 안 봐도 뻔했다. 육아와 야근에 지친 얼굴. 반지 빠진 손가락. 셔츠 소매 끝이 살짝 헤져 있었다.

저 여자는 딱 봐도 귀하게 자라 고상하게 늙어갈 사람처럼 보였다. 읽고 있는 책도 하필 <논어>였다.

'그냥 가자. 아는 척해서 뭐 하냐. 까이기 딱 좋은 날씨다.'

도진은 발길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발바닥에 본드라도 붙은 듯 떨어지질 않았다. 그냥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다. 가까이서 목소리라도 한 번만 더 듣고 싶었다. 도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옆구리에 낀 무협지를 고쳐 잡았다. 멋있는 척, 있는 척해봤자 들통나는 건 시간문제다.

차라리 그냥 '생각 없는 웃긴 놈'으로라도 기억되는 게 낫다. 그래야 부담 없이 말이라도 한번 섞어볼 수 있을 테니까.

도진은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려, 세상에서 가장 능글맞은 미소를 장착했다.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여기서 뵙네요."

이수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도진이 세상 통달한 도인 같은 미소를 띤 채 서 있었다.

"논어 읽으시네요? 역시 분위기가... 책이랑 잘 어울리셔서요. 생각이 많아 보이셨거든요."

도진의 말은 칭찬이었지만, 이수에게는 거슬렸다. 자신의 내밀한 고통을 들킨 기분. 그녀는 더 견고한 벽을 쌓으며 대답했다.

"마음이 어지러울 땐 성현들의 말씀만 한 게 없으니까요. 저는 가벼운 글은 잘 안 읽혀서요."

시선은 은연중에 도진의 옆구리에 낀 무협지를 스쳤다. 하지만 도진은 민망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책을 들어 보이며 해맑게 웃었다.

"아, 이거요? 저는 이게 제 논어인데. 여기 주인공이 '천마(天魔)'라고, 진짜 대단하거든요. 용서 따위 안 해요. 그냥 싹 다 밀어버립니다. 아주 가루를 만들어 버리죠."

이수는 흠칫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해맑게 웃는 얼굴로 '가루를 만든다'는 소리를 하다니.

"현실에선 맨날 죄송합니다잖아요. 책 속에선 좀 안 그래도 되죠. 사는 게 무거운데 책이라도 가벼워야죠."

도진은 정말 진심인 듯했다. 세속적인 가벼움이라고 무시했던 그의 행동이 삶이라는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방패였음을 깨닫자,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찌릿했다.

"근데, 아까부터 여기가 너무 비장하신 거 알아요?"

도진이 자신의 미간을 검지로 톡톡 두드리며 씩 웃었다.

"안 그래도 머리 복잡하실 텐데, 거기에 공자님 말씀까지 꽉꽉 채워 넣으려면 체해요. 마음 체하면 약도 없는데. 가끔은 저처럼 아무 생각 없이 싹 비워내는 것도 방법입니다."

그때 도진의 주머니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도진은 화면을 확인하자마자 미간을 아주 살짝 찌푸렸다.

“아... 잠시만요.”

그는 몇 걸음 물러나 낮게 말했다.

“네. 지금이요? ...알겠습니다. 바로 갈게요.”

통화를 끊은 뒤, 그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다시 웃었다.

“회사에서요. 현장이 좀 꼬였다고 하네요. 제가 가야 마무리된다고.”

그러곤 말을 이으며 이수의 굳은 표정을 살피더니, 도진은 서둘러 한발 물러서며 부드럽게 말했다.

"방해해서 죄송해요. 너무 반가워서 저도 모르게. 편하게 읽으세요. 공자님 말씀, 방해하면 죄송하니까."

도진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뒤돌아섰다. 그의 등 뒤로 거대한 '절대검제'의 표지가 펄럭였다.


이수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심하다고 생각했는데, 가볍다고 무시했는데. 이상하게도 그가 남기고 간 말이 손에 들린 <논어>의 어떤 구절보다 더 깊게 가슴에 박혔다.

이수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군자는 근심하지 않고...' 평소라면 마음에 평화를 주었을 활자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숨 막히고 빽빽하게 느껴졌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쌓아 올린 성벽이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었음을, 저 남자는 무심하게 툭 던진 말 한마디로 일깨워 주었다.

탁.

이수는 들고 있던 <논어>를 진열대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홀린 듯, 도진이 방금까지 서 있던 판타지 소설 매대로 걸음을 옮겼다.

[ 절대검제(絶代劍帝) 14권 ]

평소의 그녀라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책이다. 이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도둑질이라도 하듯 재빨리 그 책을 집어 계산대로 향했다.


그날 밤. 아이들의 울음소리도, 생활의 소음도 차단된 고요한 거실.

이수는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무협지를 가만히 응시했다. 표지를 넘기지는 않았다. 첫 장을 읽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책의 내용이 아니었다. 그저 꽉 막혀 있던 자신의 세상에 균열을 낸, 그 낯선 남자의 흔적을 곁에 두고 싶었을 뿐이다.

읽지도 않을 책이 식탁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

그 낯선 '비워냄'이, 이수에게는 묘한 위로가 되었다.



빽빽하게 채워 넣은 정답들 사이로 무심하게 틈이 생깁니다. 꼿꼿하게 버티던 마음을 내려놓고서야 비로소 막혔던 숨이 비집고 나옵니다. 가끔은 아무 생각 없이 가벼워져도 괜찮겠다는, 이름 모를 안심을 머리맡에 두는 밤입니다.

"성현의 말씀 옆에, 고작... 무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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