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조각의 완성

서로의 빈자리를 채우는 둥근 약속

by 아를밤

호수에서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채, 아파트 단지 입구에 들어섰을 때였다. 이수는 자꾸만 느려지는 발걸음을 멈추고 도진을 돌아보았다. 이 밤을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다는, 낯선 갈망이 그녀의 눈동자에 어렸다.

"도진 씨, 혹시... 좀 출출하지 않으세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도진이 배를 만지며 멋쩍게 웃었다. 사실 그도 긴장이 풀리니 배가 출출해지던 참이었다.

"그러게요. 아까 호수에서 너무 열심히 걸었나 봅니다. 어디 가서 뭐 좀 먹고 갈까요?"

이수가 잠시 망설이다 아파트를 슬쩍 가리켰다.

"그럼... 단지 상가 편의점은 어때요? 거기 야외 테이블에서 시원한 맥주라도 한 잔 하면서,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가요."

도진의 눈이 환하게 밝아졌다.

"좋죠! 편의점 맥주라니, 저한테는 육퇴 후에 누리는 가장 짜릿한 일탈이거든요."


상가 앞 야외 테이블, 차가운 캔맥주 두 개가 놓였다. 처음엔 가벼운 대화였다. 하지만 호수에서부터 이어진 묘한 기류는 두 사람을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이끌었다. 이수는 맥주 캔에 맺힌 차가운 물방울을 만지작거리며 도진을 가만히 응시했다.

사실 이수는 그동안 사람을 믿지 않았다. 현실이 너무 고단해서 누군가를 온전히 받아들일 틈이 없었다. 그저 일회성 소비처럼 가벼운 만남으로 외로움을 달래며, 그들의 장점만 수집해 머릿속에 '가상의 이상형'을 조립해왔을 뿐이다. 이런 완벽한 조각들이 실재할 리 없다고 치부하면서.

그런데 대화가 깊어질수록 이수는 깨달았다. 자신이 수천 번 문장을 씹어 삼키며 <논어>에서 찾으려 했던 '의연함'의 정답이, 정작 무협지를 읽으며 몸으로 삶을 버텨낸 이 남자에게 있다는 것을.

그녀가 모은 흩어진 조각들이 도진이라는 형상으로 합쳐지는 묘한 경이로움이었다.

"도진 씨는 참 대단한 것 같아요."

이수가 결코 가볍지 않은 톤으로 입을 뗐다.

"아이 키우는 거, 엄마인 나도 가끔은 도망치고 싶을 만큼 힘든 일인데. 남자인 도진 씨가 아이들을 그렇게 밝고 예쁘게 키워내고 있는 거 보면... 비겁하게 굴지 않고 자기 삶을 꿋꿋하게 책임지고 있잖아요."

이수는 도진의 투박한 손등을 가만히 바라보다 덧붙였다.

"도진 씨, 정말 멋진 사람이에요. 이건 진심으로 인정할게요."

도진은 맥주를 마시려다 멈칫했다. 세상은 그에게 '성실한 가장'이나 '착한 아들'이라고 말했지만, 단 한 번도 그를 '멋진 사람'이라 불러준 이는 없었다.

평생 혼자서 짐을 짊어진 그에게, 이수의 말은 굳은살 박인 삶의 통증을 어루만지는 가장 따뜻한 경의였다. 누군가 자신의 노고를 이토록 정확하게 꿰뚫어 봐주기를, 그는 어쩌면 평생 기다려왔는지도 모른다. 도진은 목 끝까지 차오르는 울컥함을 누르며 나직하게 자신의 속내를 꺼내놓았다.


이수는 도진의 깊은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진솔한 모습에 당혹감을 느꼈다. 난생처음 겪는 강력한 이끌림과 무장해제되는 기분. 이수는 그 낯선 떨림이 두려워졌다.

그녀는 소용돌이치는 마음을 억누르려 맥주를 들이켰다. 하지만 금세 취기가 올라 눈동자가 흐려졌다.

"도진 씨이..."

이수가 턱을 괸 채 도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도진은 잠시 숨을 고르며 그녀의 눈을 살폈다. 아니, 이 여자의 성벽 너머에 있는 진짜 '서이수'를 안아주고 싶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눈가를 가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손가락에 닿는 온기가 뜨거웠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도진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수의 눈동자는 이미 무방비하게 열려 있었다. 도진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이수의 입술 위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닿았다. 이수는 흠칫 놀라며 어깨를 떨었지만, 이내 도진의 목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며 그를 받아들였다. 차가운 캔맥주의 온도와 대조되는 뜨거운 숨결이 오갔다.

입술이 닿아있는 동안, 이수는 몽롱하던 정신이 오히려 맑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수천 권의 책을 읽고 사유의 탑을 쌓아도 결코 닿지 못했던 생동감이, 남자의 거친 숨결을 통해 온몸을 깨우고 있었다.


잠시 후, 천천히 입술을 뗀 두 사람 사이로 서늘한 밤바람이 스쳤다. 이수는 도진 품에 머문 채 휴대폰을 보았다. 화면에는 00:07.

"저기, 도진 씨. 벌써 12시가 넘었네요. 그럼 우리의 1일은... 어제인 거예요, 아니면 방금 시작된 오늘인 거예요?"

도진이 부드럽게 웃으며 이수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 단순한 연애의 시작이 아니라, 서로의 짐을 나눠 지겠다는 무언의 약속과도 같았다.

"어제로 해요. 어제부터 제 마음속에는 이수 씨가 아주 가득 담겨 있었거든요."

도진이 이수의 양손을 조금 더 힘주어 감싸 쥐며 덧붙였다.

"그러니까 오늘은 2일. 어때요?"

도진의 명쾌한 대답에 이수는 그제야 안심한 듯 배시시 미소 지으며 그의 가슴에 이마를 툭 기댔다. 밤의 마법은 풀리지 않은 채, 두 사람의 진짜 이야기가 비로소 시작되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만 조립하던 완벽한 조각들을 내려놓고 기어이 살아있는 온기를 마주합니다. 나를 지켜온 문장보다 나를 알아주는 투박한 시선이 더 깊은 답이 되어 돌아옵니다. 낯선 숨결이 닿는 찰나, 비로소 혼자이던 시간이 멈추고 함께 흐르는 계절이 시작됩니다.

"어제로 해요. 오늘은 2일.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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