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스럽게 맞춰가는 마음의 높낮이
알람 소리에 눈을 뜬 이수는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창틈으로 스며든 아침 햇살이 어젯밤의 푸르스름한 밤공기를 몰아낸 자리에는, 당혹감과 혼란스러움이 먼지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어제... 무슨 짓을 한 거지?'
머릿속에 파편처럼 흩어진 기억들이 하나둘 맞춰지기 시작했다. 맥주 캔의 차가운 촉감, 훅 끼쳐오던 도진의 따뜻한 숨결,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당황하게 만든 자신의 솔직한 인정들.
심장이 다시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쓰고 발을 동동 굴러봐도 얼굴에 가시지 않는 열기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때, 침대 옆 협탁 위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카톡!]
이수는 숨을 멈춘 채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에 뜬 이름은 '도진 씨'.
잘 잤어?
단 세 글자. 그 한 줄이, 어젯밤을 변명하지 않아도 되게 만들었다. 소용돌이치던 마음이 신기하리만치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오롯이 서로를 마주했던 진심이었음을 확인해 주는 확신에 찬 안부였다. 이수의 입가에 비로소 옅은 미소가 번졌다. 이유 없이, 괜히 하루가 잘 흘러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응, 도진 씨도 잘 잤어?
서로의 이름 뒤에 붙는 '씨'라는 호칭과, 조심스럽게 건네는 반말. 그 어색한 불균형이 오히려 서로의 거리를 가늠하는 가장 솔직한 보폭 같았다.
답장을 보내고 나자, 창밖의 풍경이 어제와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매일 반복되던 고단한 월요일이었지만, 이제는 이 무거운 현실을 함께 '인정'해 주는 누군가가 생겼다는 사실이 그녀의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출근한 아울렛 매장은 평소보다 더 분주했다. 진상 손님에게 시달리고 창고 정리까지 마치고 나니 온몸의 진이 다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평소라면 <논어>의 구절을 떠올리며 평정심을 찾으려 애썼겠지만, 오늘은 자꾸만 휴대폰으로 시선이 갔다.
그때 진동이 울렸다. 사진 한 장이었다.
[사진: 삐뚤삐뚤하게 그려진 토끼 그림]
"우리 막내가 그린 '토끼'예요. 이수 씨 처음 봤을 때 놀란 토끼 같았어요. 닮았죠? 아, 예쁘다는 뜻입니다."
이수는 매장 구석에서 자신도 모르게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굳게 올라가 있던 어깨가, 그제야 조금 내려왔다. '천박하다'고 치부했던 세상의 소음들이, 이 남자의 농담 섞인 사진 한 장에 의해 고단했던 오후의 피로가 가볍게 귀여운 일상이 되었다.
이틀 뒤 퇴근길, 도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으며, 그 안에는 이수를 향한 조심스러운 다정함이 배어 있었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오늘 하루가 꽤 길었나 봐요. 여기까지 이수 씨의 한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마음이 쓰이네."
능청스럽게 반말을 던지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엔 다시 예우를 갖추는 그의 화법. 이수는 그 적당한 거리감이 자신을 지켜주는 울타리처럼 느껴져 안심했다.
"10시에 편의점으로 잠깐 내려올래요? 이수 씨의 고단함을 싹 씻어줄 '강도진표 특수 피로회복제'를 어렵게 구했거든요. 아, 이거 진짜 귀한 거라 나 혼자 다 마셔버리기 전에 얼른 와야 해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보고 싶어서 그래요."
전화를 끊고 나서도 이수의 귓가엔 도진의 온기 어린 목소리가 맴돌았다. 자기가 도인인 줄도 모른 채, 투박한 농담으로 위로를 보내는 사람. 이수는 그가 준비했다는 유치하고도 다정한 '피로회복제'가 벌써부터 그리워졌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의 시계는 단지 내 편의점 앞 야외 테이블을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잠든 시간을 확인한 뒤, 슬쩍 빠져나오는 밤 10시.
약속이라도 한 듯 가벼운 옷차림으로 슬리퍼를 끌고 나와 마주 앉는 그 자리는, 낮 동안 각자의 삶에서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는 유일한 쉼터였다.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어, 이수씨."
도진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반말은 이제 이수의 심장을 간질이는 기분 좋은 떨림이 되었다. 이수 역시 '도진 씨'라는 호칭 뒤에 조심스럽게 반말을 섞으며 속마음들을 하나둘 털어놓았다.
완전한 반말은 아직 부끄럽고, 계속되는 존댓말은 왠지 멀게 느껴지는 그 중간 어디쯤에서 두 사람은 부지런히 마음의 높낮이를 맞춰갔다.
어떤 날은 여전히 자식의 삶을 당신들의 방식대로 휘두르려는 부모님의 강압적인 태도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 완강한 기대치에 부응하려다 입은 해묵은 상처들을 꺼내 보였다.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다."
그 말 뒤에 숨은 폭력적인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아는 두 사람이었기에, 굳이 긴 설명이 없어도 서로의 한숨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부모님과 아이들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는 지워진 채 오직 '역할'로만 버텨야 하는 고단함을 나누며 대화는 밤을 잊은 채 이어졌다.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은 아팠지만, 그 상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상대가 있다는 사실은 비할 데 없는 위로였다.
이수는 매일 밤 편의점 앞 가로등 아래에서 도진과 눈을 맞출 때마다 확신했다. 오래전부터 머릿속에서만 조립하던 형상이, 가로등 아래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이수는 아이들 방 문 앞에 잠시 섰다. 불은 꺼져 있었고, 고른 숨만 이불 사이로 새어 나왔다. 작은 몸들이 하루치의 세계를 다 살아낸 얼굴로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잠들어 있는 모습. 그 평온 앞에서 이수는 괜히 숨을 죽였다.
오늘 하루는 누군가의 엄마로서도, 누군가의 딸로서도, 그리고 오랜만에 그냥 ‘나’로서도 모두 무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균형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걸 이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아이들 방문을 살짝 닫고 돌아서며 이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정리했다.
오늘은, 행복하다고 불러도 괜찮은 날이었다고.
엉킨 기억을 헤집으며 깨어난 아침이 낯선 안부 하나에 순식간에 정돈됩니다. 적당히 어색하고 기분 좋게 무너지는 거리 사이에서, 비로소 나의 고단함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볼 용기를 얻습니다. 가로등 아래 나란히 앉아 서로의 그림자 높이를 맞춰가는 밤, 오늘은 참 무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