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꼭지체리

무채색 삶을 붉게 물들인 단 하나의 고백

by 아를밤

남들이 다녀온 휴가의 열기가 한풀 꺾이고 나서야, 이수의 시간은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휴가철이면 가장 분주해지는 아울렛 매장의 특성상, 성수기는 그녀에게 휴식이 아닌 치열한 전쟁터였다. 모두가 일상으로 복귀하는 늦여름의 끝자락, 이수는 그제야 해묵은 피로를 배낭에 꾸려 부모님과 함께하는 휴가길에 올랐다.

이수의 아버지. 일본을 오가며 수많은 직원을 거느렸던 일등 가죽 재단사. 하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아버지의 전성기는 세월에 씻겨 내려간 지 오래였다. 이제 아버지는 텅 빈 가죽 공장 대신 어머니의 작은 식당으로 출근해 묵묵히 앞치마를 두른다. 수십 명 공장 식구들의 끼니를 책임지던 어머니의 야무진 손맛은, 어느새 무너져가는 가족의 마지막 생계이자 마지막 버팀목이 되어 있었다.


그 무거운 고단함을 잠시 내려놓고 떠나온 휴가길. 뒷좌석에서 터져 나오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성급한 파도 소리보다 먼저 차 안을 가득 메웠다.

해질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평상에 앉아 이수는 모래사장을 바라보았다.

예순의 아버지는 여전히 정정했다. 평생 가죽을 만지며 다져진 단단한 팔뚝으로 두 손녀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모래사장 한가운데서 호기롭게 불꽃놀이를 시작했다. 한때 날카로운 칼날로 가죽을 단칼에 베어내던 그 정교한 솜씨로, 아버지는 흔들림 없이 폭죽 심지에 불을 붙였다.

“할아버지 최고!”

아이들의 환호성에 아버지는 바닷바람이 무색할 만큼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 호탕한 웃음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수의 마음에도 모처럼 평화가 깃들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버지가 지탱해온 삶의 무게보다, 그가 뿜어내는 건강한 생동감이 이수를 안심시켰다.


"이수야, 요즘 무슨 좋은 일 있니? 얼굴에 그늘이 좀 가신 것 같아서."

어느샌가 옆에 다가온 엄마가 툭 던진 말에 이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엄마의 거칠고 따뜻한 손 곁으로 다가가 앉으며, 이수는 꽁꽁 싸매두었던 마음의 조각 하나를 꺼내 놓기로 했다.

"엄마, 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나랑 나이도 같고, 말수는 많지 않은데 참 단단해. 그 사람 앞에 서면, 내가 누군가의 엄마도 딸도 아닌 것 같아. 그냥 나로 서 있게 돼. 나 그 사람 옆에서 다시 웃어보고 싶어."

엄마는 대답 대신 딸의 고운 손을 가만히 맞잡았다. 모래사장 쪽에서 불꽃을 쏘아 올리며 즐거워하는 아버지와 아이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이 깊고 따스했다.

"네 인생이 행복해야 애들도 행복한 법이다.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봐."

엄마의 나직한 음성이 밤바다의 파도 소리에 섞여 들어왔다. 그 한마디는 이수의 심장을 짓누르던 서글픈 죄책감을 썰물처럼 밀어내고 있었다. 비로소 이수의 가슴 속을 묵직하게 채우고 있던 불안의 그림자가 걷히고, 그 자리에 잔잔하고 평온한 달빛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날 밤, 아이들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이수는 조용히 펜션 발코니로 나왔다. 휴대폰에는 도진의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그의 목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스며들었다.

"잘 도착했어? 바다 예뻐?"

"응, 도진씨. 이제 좀 조용해졌어. ...자기는?"

이수의 입술 끝에서 '자기'라는 단어가 아주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도진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더 깊고 낮게 수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나도 이제 애들 재우고 앉았어. 근데 자기야, 아까 저녁 먹는데 문득 옛날 생각이 나더라. 나 어렸을 때, 우리 집 형편에 체리는 너무 비싼 거였거든. 그래서 케이크 위에 하나씩 올라가는 그 빨간 설탕에 절인 통조림 체리 있지? 그게 체리의 전부인 줄 알았어."

도진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더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20대 중반에 처음으로, 꼭지가 달린 생생한 '진짜 체리'를 먹어봤을 때... 그때 정말 충격이었어. 인공적인 시럽 맛이 아니라 단단한 과육 속에 숨겨진 그 신선한 향기. 세상에 이런 맛이 있다는 게 나한텐 진짜 센세이션이었지."
"그때 처음 알았어. 체리가 이렇게 단단하고 향기로운 과일이라는 걸. 이수야. 나한텐 네가 그래.”

이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도진의 목소리가 귓가를 지나 심장 가장 깊은 곳에 툭, 하고 떨어졌다.

‘아, 이 남자의 마음속에서 나의 존재가 이토록 선명하고 귀한 의미였구나.’

항상 누군가의 엄마로, 혹은 고단한 매장 사장으로 살며 스스로를 무채색이라 여겼던 시간들이 도진의 고백 한 마디에 화사한 붉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가 말하는 '체리'는 단순히 귀여운 애칭이 아니라, 이수조차 잊고 살았던 그녀 본연의 가치였다.


이수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도진의 목소리를 가만히 되새겼다.

"나를... 그렇게 소중하게 여겨줘서 고마워요. 내 안의 진짜 향기를 알아봐 준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야."

도진의 다정한 애칭에 이수의 입가는 비로소 맑고 투명한,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체리 너무 좋다. 정말 고마워, 자기야."

"우리 다음 주에 대부도 가서 그 '꼭지 체리' 씨앗이라도 심어볼까? 자기가 저번에 그랬잖아. 노란 알전구 아래서 바닷바람 맞으면서 조개 구워 먹는 거 좋아한다고."

도진의 목소리에 이수는 숨을 멈췄다. 스치듯 지나가며 했던 말을 그는 보석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엔 그 보석을 이수의 눈앞에 선명한 그림으로 그려주려 하고 있었다.

"이수야, 잠깐만 눈감고 떠올려봐. 우리 머리 위로는 노란 알전구가 별처럼 총총히 박혀 있는 풍경 말이야. 자기는 불판 앞에 앉아 얼굴 발그레해져서 조개 집어먹기 바쁘고, 나는 그 모습이 예뻐서 타지 않게 계속 굽고만 있는 거지."
"세상 모든 소음은 파도 소리에 씻겨 내려가고, 오직 우리 테이블만 딱 따뜻한 그런 느낌... 내가 그런 곳으로 공들여 알아봤으니까, 자기는 아무 걱정 말고 그냥 나만 믿고 몸만 와요. 알았지, 체리야?"

가본 적 없는 곳까지 자신을 위해 기꺼이 계획하고, 사소한 취향까지 세밀하게 배려해 주는 도진의 다정함.

늦여름의 밤공기는 여전히 뜨거웠지만, 두 사람의 약속은 시원한 가을바람처럼 다가올 미래를 설레게 했다. 바다는 이제 고단한 일상의 도피처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밤새 파도 소리를 들으며 처음으로 채워나갈 눈부신 추억의 도화지가 되어 있었다.



껍데기뿐인 수식어들에 가려져 무채색으로 굳어가던 날들 위로, 기어이 나의 본래 색을 찾아내어 건네주는 시선이 있습니다. 인공적인 향기를 걷어낸 자리에 남겨진 투명한 진심은, 바래진 시간을 가장 선명하고 붉은 계절로 물들입니다. 타인의 눈동자 속에서 비로소 발견한 진짜 나의 숨결을 가만히 되새겨봅니다.

"내 생애 첫 번째 진짜 꼭지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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