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여름보다 따뜻한 가을

서로의 빈자리를 온기로 채우는 생의 한 페이지

by 아를밤

휴가에서 돌아온 뒤의 일상은 다시 바쁘게 흘러갔다.

이수는 낮 동안 아울렛 매장의 팽팽한 긴장을 감당하고, 저녁이면 다시 아이들의 소란한 온기를 챙기는 고단한 1인2역의 삶으로 복귀했다. 도진 역시 퇴근 후 아이들을 챙기는 평범한 직장인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두 사람의 밤은 이전보다 훨씬 분명해졌다. 일과를 마친 뒤 약속이라도 한 듯 편의점 야외 테이블에 마주 앉아 나누는 시간은 어느새 두 사람에게 숨 쉬는 법보다 더 중요한 일상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맞이한 토요일 오후. 이수는 매장 문을 연 이래 처음으로 토요일 오후에 알바생을 세워두고 아웃렛을 나섰다. 주말에 일터를 비운다는 건 큰 결심이었지만, 도진과 약속한 '대부도'라는 세 글자는 그 모든 현실적인 고민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아침 내내 쏟아지던 비는 거짓말처럼 그쳐 있었다. 도진의 차가 이수 앞에 멈춰 섰을 때, 하늘에는 솜사탕을 흩뿌려 놓은 듯한 예쁜 양떼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체리야, 출발할까?"

차가 서해를 향해 달릴수록 전면 유리창 너머로 붉은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듯한 저녁 노을이 지평선 끝에서 두 사람을 환영하듯 찬란하게 펼쳐졌다. 창밖의 비현실적인 풍경을 감상하던 이수가 가만히 가방 속에서 약봉지를 꺼냈다. 이수는 도진의 눈을 살피며 나지막이 입을 뗐다.

"자기야, 나 약 좀 먹어도 될까? 아직은 이게 없으면 조금 불안해서."

도진은 운전대를 잡은 채 힐끗 그녀를 보더니, 세상에서 가장 담백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거 그냥 감기약 같은 거야. 목 아프면 약 먹는 거랑 똑같은데 뭘 그래. 편하게 먹어."

대수롭지 않게 넘겨주는 도진의 그 가벼운 배려. 이수는 울컥 차오르는 고마움을 삼키며 물을 마셨다.


대부도에 도착하자 조개구이집은 이미 사람 물결로 꽉 차 있었다. 웨이팅 번호를 받아 든 도진이 이수의 손을 잡고 바로 앞 해변으로 이끌었다. 노을의 잔향이 남아 있는 해변에서 도진은 쑥스러워하는 이수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처음 와본 대부도의 풍경에 도진의 눈동자 역시 이수만큼이나 반짝이며 물들어가고 있었다.

드디어 차례가 되어 들어선 가게 안은 불판의 열기와 사람들의 활기로 가득했다. 도진은 이수를 창가 자리에 앉히고 능숙하게 장갑을 꼈다.

"이수야, 오늘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 내가 다 해주고 싶어서 그래. 체리는 그냥 이 순간만 즐겨주면 돼."

그 말 한마디에, 이수의 마음속에서 누군가를 돌봐야 한다는 오랜 긴장감이 스르르 풀려나갔다. 평생 누군가의 든든한 '보호자'로만 살아온 자신을 기꺼이 품어주는 누군가의 단단한 그늘. 그 생경하면서도 따뜻한 안식처가 처음으로 온몸을 감싸 안는 기분이었다.

'아, 이제는 나도 조금은 기대어도 되는구나.'


지글지글, 조개가 입을 벌리기 시작하자 도진의 손길이 바빠졌다. 원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땀을 비 오듯 흘리는 체질인 그는, 활활 타오르는 불 앞에 서자 어느새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자기야, 땀 너무 많이 흘린다. 여기 좀 봐."

이수가 휴지를 들어 도진의 젖은 이마를 톡톡 닦아주었다. 손끝에 닿는 그의 열기가 못내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도진은 땀범벅이 된 채로도, 자기가 구운 조개를 아이처럼 맛있게 받아먹는 이수를 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진짜 잘 먹네. 예쁘다."

그 투박한 칭찬에 이수의 볼이 불판의 열기 때문인지, 아니면 몽글하게 피어오른 설렘 때문인지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누군가의 엄마도, 매장의 사장도 아닌 오직 '이수'라는 이름으로 보호받는 시간. 대부도의 밤은 그렇게 조개 익는 소리와 함께 깊어가고 있었다.

이수는 그 모습을 보며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도진이라는 사람이 좋은 건 당연했지만, 지금 이 순간 차가운 바닷바람과 입안에 퍼지는 짭조름한 바다의 맛, 그리고 나를 위해 기꺼이 땀 흘려주는 사람과 함께 있는 이 모든 감각이, 이유를 묻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했다.

그때였다. 창밖 해변에서 누군가 쏘는 폭죽이 밤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도진의 넓은 등 뒤로 오색빛깔 불꽃이 화려하게 터져 나갔다. 땀을 뻘뻘 흘리며 웃고 있는 이 남자와 그 뒤를 수놓는 뜻밖의 불꽃놀이.

이수는 자신도 모르게 땀방울이 맺힌 도진의 손을 테이블 위에서 살며시 잡았다.

"도진아, 너무 행복해. 정말로."


첫 소주잔이 부딪혔다. 그 소리는 서로의 비어있던 자리를 채우는 화음처럼 들렸다. 이수는 빈 잔을 내려놓으며 조금 상기된 목소리로 입을 뗐다.

"자기야, 나 사실 오늘... 가게 문 연 이후로 처음으로 토요일에 매장 비우고 온 거야. 자기가 가자고 한 대부도가 그 어떤 중요한 일보다 더 크게 느껴졌나 봐."

도진은 잠시 소주잔을 내려놓고 이수의 눈을 지긋이 응시했다.

"이수야, 사실 나한테도 오늘 토요일은 정말 큰 용기 낸 날이야. 알잖아, 나한테 주말은 온전히 애들 몫인 거. 부모님께 겨우 부탁드리고 애들 떼어놓고 오면서 마음 한구석이 좀 무거웠거든."

도진은 이수의 손등 위에 자신의 큰 손을 겹치며 말을 이었다.

"근데 자기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이제 정말 다르게 느껴진다. 고마워, 나 위해서 여기까지 와줘서. 오늘 먹는 조개구이. 오래 기억날 것 같아."

사실 이수는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내준 도진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자기를 위해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다고 말해주는 이 남자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 마음이 예뻐서였을까. 아직 조개 하나 입에 넣지 않았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오늘 이 저녁이 제 인생에서 가장 맛있을 거라는 사실을.


식사를 마치고 예약해둔 숙소로 향했다. 바다가 정면으로 내다보이는 조용하고 깔끔한 방. 두 사람은 현관에 서서 잠시 멈칫했다. 오직 두 사람의 숨소리와 파도 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공간.

한 번의 매듭을 풀어본 적 있는 이들이기에, 이 적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도진은 이수의 가방을 내려놓으며 창가 테이블에서 커피포트에 물을 담았다. 이수가 낯선 공간에서 압박감을 느끼지 않도록 은근히 거리를 두며 배려하는 도진의 뒷모습을 보며 이수는 다시 한번 뭉클해졌다.

"도진아, 이리 와서 좀 앉아."

이수의 부름에 도진이 따뜻한 찻잔 두 개를 들고 다가와 옆에 앉았다. 도진이 이수의 고운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이수야... 나 사실 아까부터 좀 떨려. 우리가 이렇게 단둘이 있는 게 처음이라 그런가 봐. 근데 한편으로는 자기가 조금이라도 불편해할까 봐 걱정도 되고."

"아니, 하나도 안 불편해. 자기가 나를 이렇게 아껴주는 게 느껴져서 고마워."

도진은 그 마음에 화답하듯 이수의 손등에 아주 천천히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의 첫 밤은 서두르는 욕망보다 깊은 안심과 신뢰로 채워지고 있었다.


"도진아... 나, 혼자된 뒤로 밤이 오는 게 참 무서웠어. 세상에 나만 남겨진 것 같은 그 고요함이 나를 갉아먹는 것 같았거든."

이수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가슴 깊이 눌러두었던 공포를 꺼내 놓았다.

"특히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우면, 침대 밑으로 내 몸이 속절없이 꺼져 내려가는 것만 같았어. 끝을 알 수 없는 캄캄한 심연 속으로, 빛 한 점 없는 차가운 바닥까지 나 혼자만 계속해서 가라앉는 기분... 그 어두운 무게가 나를 짓누를 때면 정말 숨이 안 쉬어지더라."

"나도 그랬어, 체리야. 나만 멈춰 서 있고 세상은 저만치 달려가는 것 같아서 숨이 턱 막히기도 하더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이혼 후의 고독. 하지만 그 아픈 기억을 나누면 나눌수록 지금 이 방의 온기는 더욱 선명해졌다.

"이제 자기가 혼자 견뎌야 할 밤은 없을 거야. 내가 옆에 있잖아. 우리 이제 서로의 밤이 되어주자. 무서운 고요가 아니라, 내일이 기대되는 그런 평온한 밤 말이야."

도진의 목소리는 파도 소리보다 더 깊고 든든하게 이수의 귓가를 맴돌았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 이수에게 대부도의 이 첫 밤은, 오래도록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차가운 겨울을 지나 마침내 도착한 가장 따뜻한 계절이었다.



늘 누군가를 받치던 어깨를 접고 처음으로 타인의 그늘 아래 깊숙이 몸을 들이밉니다. 아픈 자리를 꺼내 보여도 그저 대수롭지 않게 받아주는 온기 앞에서, 팽팽했던 긴장이 속절없이 풀려나갑니다. 혼자 침잠하던 밤의 공포가 비로소 발 딛고 설 수 있는 단단한 평온으로 여뭅니다.

"평온한 밤이 되어줄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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