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시르와 왈츠를(Vals Im Bashir, 2008)
1982년 9월 14일 오후 4시 10분. 레바논의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 예정이었던 바시르 제마엘이 아쉬라피에에 위치한 팔랑헤 당 사무실에서 폭탄테러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이 테러를 주도한 자들은 시리아 사회민족당(SSNP) 당원과 시리아의 정보요원들이었다. 당시 팔랑헤 당원들의 우상이었던 바시르 제마엘의 암살 소식은 당원들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복수심을 심어주었다. 내면의 분노와 불타오르는 복수심은 결국 외부로 향했다. 그 대상은 다름 아닌 레바논에 팔레스타인 난민들이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이스라엘과 시리아가 레바논에 개입하게 되고, 당시 이스라엘 군으로 레바논에 입성한 군인 중 한 명의 기억을 되찾는 영화. 그것이 바로 <바시르와 왈츠를>이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탄생한 <바시르와 왈츠를>의 특징 중 하나는 영화가 가해자의 입장에서 서술된다는 것이다. 아리 폴만은 이 영화의 감독이자 주인공으로 영화를 통해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망각이라는 본능에 맞서, 회상이라는 노력을 통해, 그가 되찾고자 하는 기억의 바닷속에서 우리는 함께 항해한다.
예술을 평가하는 방식에는 여러 관점이 존재한다. 예술은 과연 도덕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예술 그 자체로만 평가되어야 하는가? 혹은 인간이 만드는 예술은 도덕과 필수 불가분의 존재로 평가되어야만 하는가?
나는 영화라는 예술매체에 반드시 심오한 해석과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는 영화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답기에. 특히 봉준호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했던 “당연히 영화에 메시지가 있다는 건 좋을 수 있다. 그러나 영화가 메시지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영화는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 있어야 된다.”라는 말에 깊은 공감을 느낀다. <바시르와 왈츠를> 역시 애니메이션 형식이 주는 다채로운 장면들과 함께, 회상과 상상 그리고 꿈이라는 요소가 막스 리히터의 멋진 음악들과 어우러지며 자아내는 몽환적인 느낌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하지만…
주제와 소재 자체가 내포하는 무게를 고려했을 때, 이 영화가 사회적으로 미칠 영향력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특히 아픈 과거에 대한 가해자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다큐멘터리인 만큼, 이 영화가 결코 도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영화라는 것은 만드는 사람의 가치가 어느 정도 투영된 결과물일 수밖에 없고, 그로부터 자유롭기가 쉽지 않다. 감독은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당시의 기억을 회고하며 어느 정도 사회적 책임을 지고자 노력한다. 모두가 망각하는 상황 속에서 회고를 통해 지나간 진실에 접근해보자 하는 노력은 정도의 여부를 떠나 우리의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하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었던 상황에 대해 자기 합리화하고자 하는 느낌 역시 영화 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영화의 시작은 죄의식에 의한 꿈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죄의식을 해결하고자 무언가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감독 개인의 압박감에 의해 탄생한 영화는 아닐까 하는 의문은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물론 제작하는 개인의 입장에서 영화를 통해 자신의 죄의식을 씻어내고자 하는 의지와 목적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할 수는 있다. 그렇다 해도, 개인을 떠나 이 영화가 당시의 당사자들을 비롯해 스크린이라는 베일을 넘어 감독의 선택적 시선을 따라가는 불특정 관객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은 아닐까. 무엇보다도 감독이 과연 죄의식과 관련한 자신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을지도 의문이다. ‘자기기만적인 책임회피의 태도’는 결코 본질적으로 죄의식을 씻어내는 행동일 수 없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