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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나름 Aug 27. 2023

목욕탕집 친구

스누트 5-6월 · 3회 │ 나에게 열등감을 준 친구의 추억

  1987년 여름, 만삭의 임산부가 동네 목욕탕에 들어섰다. 손바닥만 한 수부실 창 너머 분홍색 로커 키를 건네던 여주인 시선이 손님 배에 빼꼼 멈췄다.

  “예정일 언제라예?”

  다음 달이라는 대답에 자기는 이제 15주라며 봉긋한 배를 어루만졌다.

  “둘이 같이 학교 다닐 수도 있겠네예.”


  H엄마의 예언대로, 우린 우성초등학교 3학년 6반 21번과 38번으로 만났다. 우리 집과 H네 목욕탕까지는 191미터. 299걸음이면 닿았다. 두 소녀의 방과 후 최대 난제는 "오늘은 누구 집에 갈까?". 18평 방 두 칸 아파트에 살던 난 목욕탕 건물 3층을 온전히 가정집으로 쓰는 H네를, 또래보다 통통해 엄마 몰래 먹기엔 소리 없이 삭 녹는 <사또밥>이 최고라던 H는 뭐든 맘껏 먹으라는 우리집을 좋아했다.


  그래도 토요일은 어김없이 두 엄마도 함께 H네 여탕이었다. 책가방이며 옷을 홀랑 벗고 냉탕으로 와다다 뛰어가는 136센티미터의 두 소녀를 두고 H엄마는 “아빠 닮아 통통한 H가 아름이만큼만 날씬했으면”, 우리 엄마는 “다 키로 가니 걱정 말라”고 했다. H는 엄마의 관리보다 아빠 DNA 영향이 더 컸는지, 늘 또래보다 10키로그램은 더 나갔다. 언제부턴가 H엄마는 우리 목욕날 여탕보단 수부실을 지켰다. 음료수 아주머니 말로는 태권도며 식단이며 아무리 관리해도 살이 빠지지 않는 딸과 내 알몸을 같이 보는 게 속상해 더는 여탕에 안 들어오셨단다.


  우린 중·고등학교도 같았다. (이때 H는 살이 많이 빠졌다.) 중 3 겨울방학, H는 수리Ⅰ·Ⅱ를 선행 학습하는 대치동 기숙학원에 갔다. 그 즈음, 우리 엄마는 일주일에 두세 번이던 목욕탕에 안 갔다.

  “그냥 두면 고등학교 성적 큰일나요.”

  대구에서 대치동까지 딸을 보낸 H엄마 조언은 형편이 못 되는 우리 엄마의 죄책감을 건드렸을 테다. 고등학교 첫 시험 결과 발표날, H는 당연히 그 반에서 1등을 했고, 나도 뜻밖에 우리 반에서 1등을 했다. 중학교 시절 H보다 반에서도 6등은 뒤졌던 내 성적이 급등한 건 H엄마의 자랑 어린 걱정과 우리 엄마의 근심 배인 담담함을 추진력으로 몇 주간 새벽까지 공부한 덕이었다. 오랜만에 엄마는 목욕을 갔다. 2학년때 나는 문과로, H는 이과로 다른 리그에 진출하자 드디어 목욕 자유 출입 시대가 도래했다.


  휴, 우리는 대학도 같은 곳에 합격했다. (고3때 그녀가 문과로 전과했지만 다행히 학과는 달랐다.) 아뿔싸, H의 30퍼센트 장학금 통지서가 먼저 도착했다. 2년간 목욕 입장 자율화에 방심했던 엄마가 당해버렸다. 눈치 없이 늦은 나의 전액 장학금 통지서는 2주만에야 엄마를 목욕탕에 갈 수 있게 했다.


  그리고 4학년 여름, 나는 H의 외국계 중소기업 취직 소식을 엄마로부터 들었다. 졸업도 전에 취업한 게 기특하다며. 분명 축하도, 불안도, 견제도 진심이었다. 그 해 가을, 내가 대기업에 입사해 서울 창천동의 여섯번 째 자취방 매물을 보고 있던 때, 엄마 전화가 걸려왔다.

  “딸, 서울은 어떻노? 어~ 엄마, 지금 목욕탕에 아줌마들이랑 있지.”


  그땐 엄마가 유치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나도 엄마의 자존심을 연료로 성장했던 것이 사실. 그래서 현재 스코어는? H는 대구에 사업가 집안으로 시집 가 딸 둘 낳고 잘 산단다. 나는 남편과 애 대신 취미만 많은 신도시 싱글녀로 살고 있다. 누적 스코어는 둘째 치고, 이 정도면 최신 라운드는 (엄마 기준으론)내가 졌다. 엄마, 미안해. 결혼이랑 출산은 그른 것 같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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