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디
요가에 대한 흔한 이미지 셋. 첫째, 요가는 몸이 유연해야만 할 수 있다. 둘째, 요가는 정적이라 운동 효과가 없다. 셋째, 그 대신 요가 하는 사람은 차분하고 고요할 것이다.
찰랑이는 리넨 커튼과 대형 몬스테라 화분, 낮은 나무 선반 위 가지런히 놓인 다도 세트와 싱잉볼을 배경으로 연체동물 버금가는 자세를 자랑하는 SNS 속 요기니들. 이십 년 전 버스 손잡이만 한 링 귀걸이와 아디다스 트랙탑을 따라 사게 했던 우리의 효리 언니가 제주의 자연광을 받은 맨 얼굴로 고요한 호흡과 몸의 움직임에 집중하는 일상을 담은 리얼리티 TV쇼. '요가'하면 떠오르는 신(Scene)은 역시 미디어에 비친 모습이 절대적이다.
그래서 요가를 경험한 적 없는 사람들은 필라테스나 헬스 같은 취미 운동 쯤으로 여기거나 그보다 땀이 덜 나는 스트레칭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요가로 살이 빠져?"라는 무구한 궁금증이 단골 질문인 걸 보면. 하지만 요가는 생각보다 팔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이 뛰고 목에서 피맛이 나곤 하는데, 그런 운동의 개념을 넘어서는 무언가도 또 있다. 요가학파 창시자 파탄잘리는 '요가란 마음의 변화나 요동을 고요하게, 혹은 통제하는 것'이라며 여덟 단계의 수련을 통해 이룰 수 있다고 했다. 그중 유일하게 외부에 보여지는 '아사나 (요가 동작)'다 보니 그것만이 요가의 전부라고 대게 사람들은 오해한다. 하지만 요가를 하는 사람들은 그것은 궁극을 향하는 여덟 단계 중 겨우 세 번째임을 안다.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에서 에서 말하는 '요가의 여덟 단계'
1. 야마 (Yama) : 금계, 윤리적 지침, 도덕적 규율
2. 니야마 (Niayma) : 자기 훈련
3. 아사나 (Asana) : 요가 동작
4. 프라나야마 (Pranayama) : 호흡법
5. 프라티야하마 (Pratyahara) : 외부에서 내부로 주의를 가져 옴
6. 다라나 (Dharana) : 집중
7. 디야나(Dhyana) : 명상
8. 사마디(Samadi) : 해탈, 깨달음, 요가 상태
야마, 니야마를 오히려 어려워하며 (무엇이든 기본에 충실한 것이 가장 어려운 법이니.) 하루 한 시간 아사나만 겨우 하고 있는 내가 감히 기원전 600년 부터 있어 온 요가를 대변할 수 없지만, 요가는 유연한 사람만 할 수 있고 (살 빠지는) 운동이 안될 것이라는 편견에 대해서는 내 몸을 빈약하나마 반박 증거로 슬쩍 내밀 순 있다. 날 때부터 유연성과 거리가 멀었던 나는 어린 시절 <호기심 천국>이나 <스펀지>에서 여자는 되고 남자는 안된다는 자세를 따라 하면서 선머슴 같은 성격이 몸에도 있는 건가 싶었다. 남녀의 유연성을 비교하는 자세마다 나는 남자에 가까웠으니까. 그래서 이십 대 중반 첫 요가 수업에서 두 발을 맞대 앉는 나비 자세를 했을 때 내 양 무릎만 혼자 바다 건너 텍사스에 돌풍을 일으킬 모양으로 바짝 솟았어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른 후반이 되어 어느 날 문뜩 바닥에 진득이 닿은 무릎을 보고 당황했다. 앞 뒤로 90도 밖에 벌어지지 않던 다리가 꼬리뼈도 온전히 바닥에 닿게 쫙 찢어져 '하누만 아사나'를 성공했을 때는 앓는 소리 대신 놀라움의 탄성을 뱉었다. 이게 된다고? 없던 유연함이 생기고, 타고난 근질이 뚜렷해지고, 틀어진 자세가 다듬어지면서 몸의 라인이 예뻐졌다. 그래서 살은 얼마나 빠졌는가 하면, 사실 이 나이쯤 되면 다 알지 않나? 다이어트는 운동 보다 식단이라는 것을.
어쨌든 세 번째 편견, '요가인은 차분하고 고요할 것이다'에 대한 해답은 나도 궁금했다. '몸이 고통스러운 만큼 마음이 평안해진다'던 석가모니 말씀처럼 매트에 땀이 뚝뚝 떨어지게 수련하다 보면 잡생각이 사라지고 마음이 고요해지긴 했다. 그날 밤 혹은 다음날 출근 전까지는. 하지만 수련실 밖 나는 여전히 감정적인 리액션을 입과 미간 사이로 종종 발사했고, 그마저도 주체하지 못하면 야밤에 차돌박이와 소시지까지 추가한 마라맛 엽떡을 시켜 몇 입 먹다 그대로 냉장고에 처박아 두고 후회했다. 속은 또 어찌나 아린지.
그래서 진짜 요가적 삶을 살 것 같은 선생님들이 궁금했다. 잦은 이사로 꽤 많은 요가원을 거치면서 수업 외에도 자주 대화를 나누게 된 몇 분이 있었다. 그 중에는 내가 나아가야 할 평정의 깃발이 되어주는 분도, 근엄하게 시퀀스를 읊던 목소리는 어디가고 세상 가벼운 분도, 은근히 사람을 가리고 무시해 괜히 움츠려 들게 하던 분도 계셨다. 요가 선생님과 썸이나 연애를 했다는 지인의 이야기를 어쩌다 듣게 됐는데, 그들도 숲 속 명상 음악보단 클럽 노래를 좋아하고, 같이 일하는 사람이나 회원때문에 열받기도 하고, 예민한 성향을 다스리려 요가를 시작했다는 의외의 모습을 접했다. 하지만 실망보단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 사람 사는거 다 똑같지, 뭐.
내가 초등학생 때는 시끄럽고 산만한 애들은 서예와 바둑 학원에, 소심한 애들은 웅변이나 연기학원을 다녔다. 그래서 오히려 서예, 바둑 학원이 더 번잡스러웠고, 웅변학원 발표회에선 이 연사 큰 (염소)소리로 외치다가 울며 내려오는 애들이 더 흔했다. 그래도 그 경험 덕에 어른이 된 지금, 내 자신에게 필요한 곳을 찾아가면 조금은 나아진는 것을 안다. 그 곳은 누군가에게는 극한의 에너지를 뽑아 내는 크로스핏 박스일수도, 러닝화 신고 가볍게 나선 한강 공원일수도, 취향에 맞는 음악과 위스키가 준비된 바일수 있다. 나에게는 요가원이다. 어릴 때와 달라진 건 억지로 끌고 가는 엄마 손 없이 제 발로 (심지어 내가 번 월급으로) 찾아간다는 것. 그때와 똑같은 건 그 곳이 나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주진 않는 것이다. 하지만 나를 그곳에 데려다 놓는 것 만으로도 마구잡이로 달리던 나를 잠깐 멈춰 세워 숨 고르기를 할 수 있는 시간, 자신을 관찰하고 애정어리게 정비하는 힘을 얻는다. 절대 안될 것 같던 아사나가 시간과 노력으로 다듬어지듯, 중심을 잡는 힘도 견고해 질 수 있겠지. 오늘도 그런 마음으로 수련실 거울 앞에 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