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멍한 기분은 하루 종일 계속 대고 길을 걷고 있어도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다. 그토록 와보고 싶었던 곳이 눈 앞에 있는데 그 아름다움을 고산병 때문에 누리지 못하다니. 아레키파에서 비행기를 타기전 고산병에 좋다는 약도 먹었는데 약발이 피해가는 몸인가 쿠스코에 온지 하루가 지났는데도 아직 고산병 증상으로 해롱대고 있던 차였다.
엎친데 덮친격 흐리고 비마저 오는 쿠스코의 날씨에 마음은 여행에 대한 회의로 가득차 올랐다. 몸뚱아리가 말을 듣지 않는데도 방청소와 점심을 먹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숙소를 나섰다.
어디를 갈까. 갈 곳 많은 쿠스코에서 막상 갈곳이 없다니. 인터넷으로 이곳 저곳을 검색하다 쿠스코에 있다는 한국인 음식점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발길을 잡았다. 며칠 만에 눈 앞에 된장찌개를 보니 목이 매어왔다. 맛을 떠나 그냥 한국 음식을 먹는다는 것 자체가 감동이었다. 점심시간이라 식당에는 손님이 꽤 많았다. 대부분 한국 손님으로 연령도 성별도 다양했다.
좌석이 만석이라 우연히 겸상을 하게 된 P가 점심 먹고 무얼할꺼냐고 묻는다. 고산병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노라 말하는 내가 불쌍했을까 P는 차나 한잔 하자고 했다.
- 코카콜라 아니고 코카차요.
이 무신 아재개그란 말인가. 몇 달은 자르지 않은 듯한 장발의 머리와 까맣게 탄 피부는 P 의 여행 이력을 보여주는 듯 했다.
한식당을 나온 우리는 비가 흩뿌리는 아라미스 광장 근처 골목에 있는 찻집으로 들어갔다. 은은한 조명에 차분한 인테리어, 손님도 우리 두사람밖에는 없었다. 뜨거운 코카차 한잔을 앞에 두고 창밖으로 보이는 아라미스 광장을 보고 있자니 장소와 차종류만 바뀌었을 뿐 인사동 어느 전통찻집에 와있는 기분이 들었다.
코카차에 뜨거운 물을 몇번 리필하는 동안 우리는 인생이야기를 좀 나눴다. 오늘 만나고 다시 보지 않을 사람이라 생각해서였는지 고산병 때문이었는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낯가림이 심한 편이었는데 어쩐지 그에게만은 수다쟁이가 되었다. 한참을 떠들다 고개를 돌려 보니 비가 그친 아라미스 광장에 햇살이 빛나고 있었다.
- 고산병은 좀 어떠세요?
고산병? 이럴수가 그와 코카차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동안 단한번도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 이거 코카차 덕분인가요? 님과의 수다 때문인가요?
- 아무렴 어때요. 고산병 탈출기념으로 코카차는 님이 쏘시죠.
기분좋게 차값을 내고 우리는 쿠스코 전망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는 곳으로 발길을 잡았다. 제법 오르막길이
었는데도 머리가 아프지 않은게 신기할 정도였다. 도착한 전망대에서 쿠스코의 붉은 지붕들과 구름이 만들어 내는 풍경을 보니 탄식이 터져나왔다. 이 아름다운 쿠스코를 못보고 방에만 있었다면 얼마나 아쉬웠을까 하고. P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맛있는 저녁을 쏘는 걸로 대신하기로 했다. 저녁을 먹고 다시 온 아라미스 광장에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 P님, 내일은 뭐하세요?
뭔가 아쉬운 마음이었을까.
P에게 물었다.
- 내일은 리마로 갑니다.
아...
P는 남미를 시계 방향으로 돌고 있다고 했지. 나는 리마를 시작으로 반시계 방향으로 남미를 돌고 있었다. 내 마음을 눈치챘을까 P가 문득 말했다.
- 언젠가 길 위에서 다시 만나면 차 한잔 따뜻하게 해요. 그때는 제가 살께요.
까만 얼굴에 환하게 웃는 P의 흰 이빨이 유난히 눈부셔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