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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나는 주머니 Mar 14. 2023

나에게 체지방률 16%의 의미란

나의 만주벌판에 초대할게


근력 운동도 무척 재미있지만 아직까지는 달리는 것이 더 즐겁다.

숨이 극도로 차오르면 몸의 모든 것들이 감각되기 시작한다. 평소에는 존재를 잊고 지내던 고마운 나의 것들. 심장, 폐, 식도, 목 울대, 복사근, 정강이, 목뼈, 침샘, 심지어 귓바퀴까지. 아, 너희들 거기서 그렇게 애쓰고 있었구나. 하며 경의를 표하고, 나의 ‘나의 것’들에게 조금 더 부지런해지고 싶어 진다.

달리기를 하며 행복해지는 순간을 하나 꼽자면 클래식을 들으며 막판 스퍼트를 달리는 때이다. 평소에는 잘 듣지 않는 클래식을 하필이면 달릴 때 듣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건 바로! 곡이 길기 때문이다. 요즘 가요는 길어도 5분을 넘지 못하는데, 클래식은 보통 한 악장에 15분에서 20분 정도 소요된다. 60분을 달리려면 가요 15곡은 들어야 하는데 클래식은 4악장으로 이루어진 1곡의 교향곡만으로도 충분하니 넘나 경제적인 것!

달리기 마지막 15분에는 내가 알고 있는 곡들 중 가장 웅장한 곡을 선곡하여 듣는다. 정말 너무너무 힘이 들어서 앞에 저 앞에 걸어가는 젊은 커플이 매고 있는 백팩의 도트무늬의 개수나 러닝머신 스피커 구멍의 개수 따위를 세면서 속으로 욕을 연진이처럼 하고 있을 때 즈음이면 그 곡의 클라이맥스가 흘러나오는데, 마치 그때는 내가 만주벌판을 달리는 광개토대왕이 된 것만 같아 감격하곤 한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나에게 체지방률 16.3%의  의미란.

왜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내가 봐도 내 자신이 몹시 별로라고 느껴지는 그런 날 말이다. 브로콜리 그 마저도 나의 뒤통수에 한숨을 퍼부을 것 만 같은 그런 날. 탓할 자를 찾고 싶어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결국 그 손가락은 나에게 돌아오는 그런 한심한 날.

그런 타박의 순간에 아주 미약하게나마 ‘나 자신 까방권’을 선물 받은 기분이랄까. ‘어이 이것 봐 나 자신, 몇 달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7킬로미터 이상씩 달릴 정도로 최선을 다하여, 수고롭게, 숨차하며 지냈으면 이 정도는 그냥 한번 넘어가줄 수 있지 않냐! 인정???’ ‘응. 뭐. 인정’

  


앞으로도 나만의 만주벌판을 꾸준히 달려서 나만의 세상을 부단히 정복하여,

우리 아가들이 아가를 낳아 그 아가들이 성인이 되면, 나의 만주벌판에 초대해야지. 함께 만주벌판을 달리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아주 맛있는 와인을 맘껏 마셔야지.

아직 갈 길은 한참 멀었지만 먼 길이 남아 있어 즐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리기가 끝나면 어서 빨리 머신에서 내려가고 싶어하는 다급함이 찍혀버린 사진

(덧붙임 글)

신체적 기능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몸은 당신이 살아오면서 개발해 온 모든 능력의 고향이다. 얼굴의 움직임은 마음속 갚은 감정을 표현해 준다. 몸은 음식에서 영양분을 섭취하여 전 세계로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도록 힘을 북돋아 준다.

이 모든 일을 해내는 몸이 어찌 혐오스럽거나 수치스러울 수 있는가. 이런 경이로움에 눈뜨지 못하는 것은 문화가 들려주는 대상화의 합창 때문이다.

-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러네이 엥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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