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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나는 주머니 Mar 28. 2023

3. S전자 연구원 남자친구가 생겨버렸다.


나의 예상치 못한 남자친구는 매번 데이트 시간에 늦었다.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그마치 함 들어오는 날조차도 두 시간 반을 늦었으니까.

그를 보겠다고 나의 부모님과 동생은 당연하고, 나의 이모 세 분과 이모부 세분, 외삼촌과 외숙모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과 그 자녀들의 자녀들까지 모두 모여있는 상황에서 그는 또 두 시간 반을 늦고 말았다.

“K는 지금 어디래?” “아직도 출발 못했다니?” 하며 보글보글 어르신들의 지루함이 끓어오르기 시작할 때 즈음, 일찍이 사위를 사랑하기로 마음을 굳히신 우리 아빠가 어르신들 인내심의 역치를 높여주는 매직 워딩을 시작하신다.


S전자 연구원인데 좀 바쁘겠어. 세계 1등인데!


그때 왕년에 S전자에 근무하셨다가 현재 중소기업 임원으로 재직 중이신 둘째 이모부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시며 대답하신다.


- 그럼요! S전자가 괜히 S전자겠어요? 제가 한창 일할 때는 새벽 6시에 출근해서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일하고 집에서 옷만 갈아입고 다시 나와서 일했는데요 뭐. 이 정도 늦는 것은 늦는 것도 아니지요.


S전자의 은혜에 마음 깊은 감사의 인사는 나중에 따로 드리기로 하고.


다 구겨진 양복에 커다란 함가방을 짊어지고 땀을 억수같이 쏟아내며 아파트 출입구를 향해 뛰어오는 그를 집에서 내려다보며 나는, 내가 그를 몹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또 한 번 느꼈다.



K는 늘 나에게 달려왔다.

K는 매번 나에게 달려왔고, 매번 그의 늦음을 정성스레 미안해했다. 내가 그와 결혼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그를 더 이상 달리게 하고 싶지도 미안하게 하고 싶지도 않은 마음, 그 마음 때문이었다.

간혹, K가 네 시간 동안 나를 기다리게 하다 결국 오지 못하더라도 그 당시 세상에서 자기가 두 번째로 괜찮은 여자인 줄 착각하고 있었던 나는(첫 번째는 어딘가 있겠지) 그가 전혀 원망스럽지 않았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고 평화로웠다. 그는 지금도 나에게 달려오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을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 믿음이 나에게는 낭만이었던 것이다.



*참고 : 그의 회사는 동탄에 있고 우리의 데이트 장소는 주로 그의 회사 통근버스 정류장 근처인 명동 혹은 강남역이었다.


- 오빠 아직 출발 못했어?

- 진짜 미안해… 아직 출발 못했어.

- 언제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아? 또 불량 생겼어?

- 지금 개발 중인 제품 코드를 테스트했는데, 1분도 안돼서 죽었어. 수정해서 제대로 돌아가는 걸 봐야 퇴근을 해야 하는데 뭐가 문제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네.

- 그거 오늘까지 꼭 해야 해?

- 내일은 또 다른 불량이 생길 거라… 미안해…


K는 7일 중에 6.5일을 회사에서 보냈다.  (지금은 물론 근로법이 개정되어 상황이 많이 변화되었다.)

도대체 저 회사는 왜 저렇게 일이 많은 걸까? 저 회사의 모든 사람이 저렇게 일을 하나? 저 회사만 저렇게 일을 시키는 걸까 아님 모든 대기업이 저렇게 일을 시키는 걸까?

아무리 K가 나에게 친절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더라도 의문은 커져만 갔다. 생명을 구하는 일도 아니고, 나라를 지키는 일도 아니고, 세계 평화를 위해 싸우는 일도 아닌데 무슨 일이 저렇게도 많다는 건지 내가 사는 세상 속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구석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 당시 나는 한 대학교 총장실의 비서로 일을 하며 무력감과 권태에 사로잡혀 있는 시기였다. 비서실장님의 관리하에 계획되어 있는 몇 가지의 실무적인 일들만 처리를 하면 하루의 일과가 마무리되었고, 학교라는 틀 안에서 준공무원처럼 일하며 기존의 업무 프로세스에 벗어나는 창의적인 일은 철저히 제한이 되어 있었다.  간식으로 매일 먹는 단팥빵을 스콘으로 바꾸는 것도 어려운 실정이었다면 말 다했지.


이때 또 나의 보헤미안 기질이 스멀스멀  자극되어서 조금 더 다이내믹한 곳으로 회사를 옮겨볼까 시동을 걸다가 예전 구직 시절 한 취업사이트에 올려두었던 이력서를 다시 공개로 전환하고 또다시 현실에 매몰되어 잠시 잊고 있었는데.


한 달 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온다.


- 안녕하세요, P 씨 휴대폰 맞나요?

- 네, 맞는데 실례지만 어디시지요?

- 저는 C서치펌의 J부장입니다. 아직 구직 중이신가요?

- (아 맞다. 나 이력서 공개로 해뒀지!) 아, 네네 구직 중입니다.

- 이력서 검토를 해봤는데 검토 제안드릴 회사가 있어서 연락드렸어요. 비서경력 3년 이상인 경력직 비서분을 찾고 있습니다. 부사장급 임원분의 비서자리고 정규직입니다.

- 혹시 어느 회사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 네, 000그룹입니다.


내 인생의 결이 바뀌게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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