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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나는 주머니 Feb 28. 2023

2. 쟤 뭔데 나한테 관심이 없어?

S전자 반도체 연구원입니다.

남편은 사촌 언니의 친하지 않은 동아리 친구였다.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오랫동안 유학을 다녀온 언니의 귀국 독주회에 나는 가족의 자격으로 나의 남편은 동아리 친구의 자격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연애를 시작하고 한참 뒤에 친하지도 않은 동아리 친구의 독주회에 왜 참석을 했냐고 물었더니. 독주회 근처에 결혼식이 있었는데 결혼식 끝나고 심심하던 차에 독주회 뒤풀이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술이나 먹을까, 하는 맘에 들렀다고 한다. (이 광활한 우주에 한낱 먼지와도 같은 우리네 중 당신을 만날 운명이었었나 봐, 라는 말은 못 해주는 거지 그치. 암.)


언니 동아리는 ‘대학생 봉사동아리’였는데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시겠지만 봉사동아리가 봉사를 하는 주체는 ‘주(酒)님’으로 유명했다. 당시 언니의 바이올린느님은 몇천만 원을 호가했었고 그들은 바이올린느님을 택시 뒷자리 사장님 석에 고이 안전벨트를 매어드리며 술을 마시러 다니곤 했었다. 아찔.


명성에 걸맞게 독주회 뒤풀이에 참석한 동아리 친구들 20명 중 15명은 남자였고, 나는 그들 사이에서 뉴페이스가 되는 상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15명의 남성 중 14명의 남성이 나에게 관심을 사려고 노력했는데 (에헴 그땐 좀 괜찮았…) 그들은 각자의 잘남을 자신들의 방식대로 뽐냈다.


A:  아 내가 디자인한 에어컨이 광고에 나왔더라고~ 나는 그냥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상까지 받는다네?

B:  공부하느라고 이런 술자리에 나온 지 얼마나 오랜만인지 모르겠다. 생각보다 회계사 공부가 빡세더라고.

C:  술 값은 너희가 내라. 공무원 월급 좀 적니? 연금만 보고 살아.


흐음. 여러분들 내 기준에서는 다 탈락. 낭만이 없어 낭만이.

그 와중에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던 단 한 명의 남성, 그 남성이 바로 2년 뒤 내 남편이 된다.(극적전개)




그 당시의 나에게는 20대 중반의 어린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싱그러운 반짝임이 있었다.

거기다가 나는 보통 여자들처럼 세속적이거나 속물적이지 않으며(죄송합니다. 재수가 없었습니다.) 축구도 좋아하고, 기타도 치고, 발레도 하고, 서핑도 하는, 짱 멋진 인간인데, 어?


쟤 뭔데 나한테 관심이 없어?


융숭한 대접을 받은 술자리를 마치고 나서도 뭔지 모를 찜찜함이 남아있었다. 그래, 네가 내 승부욕에 불을 지폈다 이거지.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언니, 어제 그 사람 있잖아. 베이지색 점퍼. 나 그 사람 소개해줘!


그러고 나서 처음 만나기로 한 날은 토요일 저녁 6시 30분 대학로에서였고 그는 9시가 다 된 시간에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아 물론 중간에 왜 늦냐, 어디냐 등등의 연락은 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너의 늦음이 전혀 개의치 않다. 늦을 테면 늦어라. 부들부들.

멀리서 뛰어오는 그를 보며, 뭐라고 첫인사를 건네어야 할까 고민했다. ‘시간이 이렇게 됐는지도 몰랐네요? 멀리서 오셨나요? 안녕하세요? 배고프시죠? 식사는 하셨나요? 아 뭐라고 하지?’

하지만 정작 내 입에서 뇌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온 말은 달랐다.

“아니 뭐 하시는 분이길래 주말 저녁 이 시간까지 일을 해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S전자 반도체 연구원입니다. “


스스로 악의 구렁텅이를 꾸역꾸역 찾아내서 빠지는 것, 이것 또한 낭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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