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예지
세간이 빠져나간 호젓한 방 안을 둘러보았다. 한 때 사람이 살았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거대한 적막감이 나를 휘감았다. 마치 위엄 있는 교장 선생님 앞에 선 어린 학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지막으로 욕실 문을 열었다. 오월의 햇살이 동그랗게 들어와 있었다.
이 년 전 이 집을 계약하던 날, 머리가 벗겨진 유명 부동산 아저씨는, 싼 가격대에 나온 집 치고는 주변 환경이 좋아 살기가 꽤 편할 것이라고 했다. 속없는 말은 하지 않을 사람처럼 보여 그의 말에 전적으로 신뢰가 갔다. 그는 사막같이 메말라 보이는 민둥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 혹시 전에 이 집에 누가 살았는지 아세요?
- 젊은 아줌마가 사내아이를 혼자 기르며 살았소.
그는 계단을 오르는 일이 꽤 버거웠던지 숨찬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 칭얼거리는 듯한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내가 이 집을 처음 만났던 날 텅 빈 방안에서 마주한건, 기묘한 온기와 형언할 수 없는 적막감으로 중무장한 고적한 기운이었다. 도저히 사람이 살았을 것이라는 믿어지지 않는 깨끗한 바닥과, 손때조차 묻지 않은 듯 새 하얀 벽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삐걱거리는 욕실 문을 열었을 때, 동그랗게 들어오던 햇살과, 그 햇살 속에 오롯이 자리한 솔이 고르지 못한 칫솔, 반도 채 쓰지 않은 박하향 치약을 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집을 서둘러 계약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가 찾아왔다. 나는 그로부터 언제나 도망 중이다. 하지만 언제나 여지를 남겨둔 건 내 쪽이었다. 지구 끝까지라도 나를 찾아와주었으면 싶었다. 이젠 그의 여자와 벌이는 숨바꼭질이 지겹다. 하지만 불안한 고양이 눈을 하고 찾아 온 남자만은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다.
돌아선 남자의 등허리는 광활한 우주처럼 펼쳐져 있다. 이따금 그의 등을 쓸어내릴 때마다 길 잃은 우주인처럼, 그 공간 속을 먹먹한 두 눈으로 부유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곧게 뻗은 등허리에 검지와 중지로 두 발을 내린다. 슬픈 일이지만 우주 공간에는 중력이 없다. 내 자그마한 두 발은 우주의 어느 별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헤매길 반복한다. 내 손장난에 그가 간지러웠던지 ‘그만해’라고 저지한다. 나를 안아주기 위해서인지 문득 그가 고개를 돌리려 하지만, 나 역시 잠긴 목소리로 그의 손길을 뿌리칠 따름이다.
-그냥, 그대로 있어줘.
그즈음 목욕탕으로 걸어가 박하향이 나는 치약을 듬뿍 짜서 이를 닦기 시작한다. 푸르스름한 달빛이 목욕탕에 가득 들어찬다. 불을 켜지 않는다.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을 만큼 용기가 없는 까닭이다. 그를 사랑하는 일은 부끄럽지 않다. 그러나 남자를 사랑하는 나를 바라보는 일은 어째서인지 역겹다. 구석구석 칫솔질을 하는 가운데, 그가 안온한 자신의 공간으로 향할 준비를 하는 소리를 듣는다.
-나, 가야 돼.
그가 목욕탕 문을 빼꼼히 연 후 조심스럽게 말한다.
-웬 이를 그렇게 오래 닦아. 불도 켜지 않고.
그가 벽을 더듬어 불을 켜려고 한다.
-하지 마. 혹시 그거 알아? 당신이 떠나고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이를 닦는 일이 어떤 기분인지?
남자는 입 안 가득 거품을 물고 이야기하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 얼굴이다. 무표정한, 너무도 무구해 보이는 눈빛. 어둠의 저쪽을 바라보는 듯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의 빛깔이 투명하다.
나는 이 집을 떠난다. 언젠가 내가 살았던 이 집에서 한 아이를 어르고 살았던 그 여자처럼. 그 여자 역시 홀로 남겨져 이를 닦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일까? 얼마나 열심히 닦아댔으면 칫솔의 날이 그렇게 닳아빠졌을까.
-출발해야 하는 데오?
-아, 네.
노동으로 다져진 살결이 단단한 남자가 나를 부른다. 그는 이삿짐을 싸러 와서는, 왜 이렇게 세간이 적은 것이냐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마, 쭉 혼자 살아서이기 때문일 거예요, 사정상 이사도 자주 해야 했고.
실은, 어느 곳에도 두 발을 내딛을 수 없는 우주인이라서요, 나의 읊조림에 그는 네? 하고 반문했다. 나는 건강한 눈동자를 가진 그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이번에는 그 어떤 단서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유명 부동산 아저씨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그는 이상하다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전에 살던 여자도 당신과 똑같은 말을 했었소.
근 이년 만에 만난 그의 사막은 더욱 더 메말라 있었다. 언젠가, 그의 사막에도 푸른 달이 뜰 것이다.
나는 칫솔과 박하향 치약을 남겨두고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