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와 지규

류예지

by 전건우

교복 상위의 왼쪽 가슴에 새겨진 이름은 이은유였다. 나는 말없이 이름 세 글자를 바라보았다. 또랑또랑한 눈빛, 저 녀석의 이름이 이은유였구나. 나는 방금 이 자그마한 체구를 가진 소녀에게 고백을 받았다. 물론 심드렁한 얼굴로 그래서 어쩌라는 표정으로 일관.


“너 다리 대따 굵다. 무슨 운동하냐?”

동문서답은 덤. 다른 여학생들 같으면 수치심 비슷한 걸 느끼고 돌아섰을 테지만 은유는 달랐다.


“구려, 최지규.”

그 아이와 나는 학기 초부터 종종 부딪쳤다. 버스 정류장에서,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나오는 길목에서, 가끔 내 아지트라고 생각했던 헌책방에서 그 아인, 당연한 공식처럼 도스토예프스키나 하루키의 소설집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근데, 다리가 유일한 콤플렉스이긴 해.”

은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너 변태지? 아니다, 이런 걸 페티쉬라고 하나?”


나는 그런 당당함이 마음에 들었다. 왜 하필이면 고백의 장소를 수돗가로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도꼭지를 잠그고 돌아서려는데 은유의 것으로 보이는 노란색 손수건이 눈에 띈다.


“야, 손수건!”

“얼굴 닦아. 교복 상의가 젖으면 칠칠맞아 보여. 설마 물에 젖은 네 모습이 터프하다거나 혹은 섹시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실 그렇게 보이길 은근히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은유는 쿨하게 뒷모습을 보였다. 어쩌면 쑥스럽거나 부끄러웠을지도. 전교에서 왕싸가지로 소문이 난 내게 고백을 했으니까.


또래 여자 아이들은 뭐랄까 도무지 여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부모님에게 용돈을 타 쓰는 주제에 고백의 장소는 터무니없이 비싼 패밀리 레스토랑 같은 곳이었다. 발렌타인데이에는 잘 먹지도 않는 초콜릿을 한 박스 사준다던가, 생일에는 비싼 시계로 환심을 사려고 했다. 막상 고백 뒤에 나누는 이야기란 연예인 혹은 패션에 관한 이야기가 전부였다. 그간에 내가 받았던 고백은 늘 그런 수순을 밟았다.


은유의 고백은 그래서 뭔가 신선해 보였다. 말과 말. 나는 말로서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좋다. 나는 은유가 건네준 손수건으로 마음껏 얼굴을 닦았다. 마른 이파리, 은유라는 이름과 어울리는 냄새가 났다. 나는 멀어져가는 그 아이의 등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5교시 문학시간. 나는 뒷자리에 앉아 은유의 가늘게 뻗은 목과 목에서 이어지는 곧은 등을 오래 바라보았다. 거절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여자 아이들에게 했던 방식으로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다. 하루가 다르게 머리숱이 적어지시는 타칭 로맨티시스트 문학 선생님은 칠판에 커다랗게 ‘은유법’과 ‘직유법’을 썼다.


“오늘은 중학교 때도 잠시 배운 적이 있는 직유법과 은유법에 대해서 가르치려 한다. 혹시 은유법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 있나? 틀려도 좋으니 자유롭게 말해보도록. 아, 이 반에 이은유가 있지. 반 아이들이 명쾌하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은유법을 이용해서 멋진 문장 하나를 만들어 볼래?”


지적을 받은 은유는 잠시 말이 없었다. 펜을 까딱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내 시원스레 대답이 튀어 나온다.



21dUd01510n3vb6pulevn_ap2dgy.jpg 사진 @ 손구용


“은유는 지규에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몇몇 아이들이 뒤를 돌아보더니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은유는 지규라니, 선생님은 의아한 얼굴로 아이들을 바라보았고, 아이들은 너 나할 것 없이 우리를 향해 야유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그제야 내 얼굴을 살피며 의뭉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이 녀석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하하하. 그렇다면 자, 은유가 자신의 마음을 은유법을 이용해 표현해 주었으니…. 최지규, 사내 대장부답게 멋진 고백에 대한 대답을 직유법을 이용해해볼까?”


그러나 쿵쿵쿵거리는 심장소리만이 들려올 뿐이다. 이상하다. 나는 이제껏 내게 고백해 온 여자 아이들한테 단 한 번도 가슴 떨리는 감정을 느껴보지 못했다. 왕싸가지, 포커페이스로 소문이 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모든 아이들이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이 중대한 상황에서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능청을 떠는 이은유,


‘와. 진짜.’

우물쭈물 대답을 회피하는 사이, 교실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최지규 실망인데, 덩치만 컸지 숫기는 없구먼. 아주 멋들어진 직유법으로 은유에 대한 네 마음을 표현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선생님은 한 술 더 떠 눈을 가늘게 뜨더니 콧망울을 찡긋거렸다. 나는 긴장감으로 바짝 마른 입술을 축이기 위해 침을 발랐다. 왠지 비겁해지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이 순간을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은유가 지규를 좋아하는 것처럼, 지규도 은유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 같다….”


'지금부터, 어쩌면 영원히'. 물론 이 말은 말줄임표 속으로 묻어두었다. ‘지금부터’로 시작해 ‘영원히’라는 말로 마침표를 찍는 순간, ‘이은유’라는 이름 세 글자는 너무나 특별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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