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예지
벤치가 하나 있었다. 앉아 있으면 강 건너 편 아파트 103동, 104동이라는 글자가 나란히 보이는 자리였다. 멋들어지게 해가 들지도, 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자리도 아니었다.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쳐버리는 곳에 불과한 곳. 벤치에는 새똥이 떨어진 흔적이 보였다. 말라비틀어진 백색의 가루가 된 배설물. 그런데 하나도 더럽지 않았다.
그 곳으로 그가 아이처럼 포르르 달려갔다. 그러고는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우리 여기에서 잠깐 쉬었다 가요.
나는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잠깐, 그때 나는 나이키 운동화를 신었던가). 첫 데이트였기에 예쁘게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뒤꿈치가 욱신거려 벤치에 앉자마자 구두를 슬그머니 벗었다.
-다리 아팠죠?
-아뇨. 그냥 답답해서 벗은 건데?
-거짓말.
그곳에 앉아 노을을 바라보았다. 아파트 두 동 사이에서 저물어가는 햇빛은 아름다웠다. 다만, 강가였기 때문에 비릿한 물비린내가 났다. 하지만 그 조차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늘 왜 이렇게 예뻐요?
-흥. 이게 바로 평상시 내 모습인데요?
-거짓말.
그가 웃었다. 교정기를 낀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귀여웠다. 감출 줄 모르는 솔직함과 대범함. 감옥 같은 교정기를 낀 채로도 껄껄거리는 모습이라니. 사귀기 전, 여러 번 그에게 강조한 말이지만, 그는 내가 꿈꿔오던 이상형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슬쩍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소쉬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표(記標)에서 기의(記意)로 미끄러지는 손짓이었다.
-나보다 나이도 많은 주제에.
-그런 말 안 하기로 했잖아요?
-이렇게 귀여우면 어쩌라고.
갑자기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숨, 을 어떻게 쉬는 거였더라. 심장이 두근 반 세근 반.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귓가에서 자꾸만 쉭쉭 바람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혀 그의 눈을 한참 바라보았다.
-명징해….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던 것 같다.
-뭐라고요?
-명징 하다고요.
-뭐가 명징 하다는 거지?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나를 바라보던 그가 어느새 핏기 없이 웃음을 거두고는 나를 차갑게 되쏘아본다. 그와 동시에 우리를 둘러싼 시공간이 교묘히 뒤틀린다. 음소거를 한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소리 없는 아우성이 연출된다.
먼저, 아파트 103동, 104동이 연속해서 무너진다. 가로수 곳곳에 숨어 있던 새떼가 놀란 듯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핏빛 노을이 우리의 얼굴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강에서는 시궁창에서나 날 법한 견디기 힘든 악취가 피어오른다.
‘그런데 이상하지. 어디선가 꽃향기가 나잖아.’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던 것 같다. 도리질을 하느라 꼭 감았던 눈을 가까스로 뜬다. 눈을 뜨니, 내 옆에 그가 앉아 있다. 갑자기 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어 시선을 피한다. 식은 땀방울이 등줄기를 서늘하게 쓸어내린다.
“무슨 잠을 그리 고단하게 자?”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안색을 살피는 그. 며칠 전, 퇴근 길 서점에 들렀다가 시집을 샀다고 했던가. 심보선의 <눈앞에 없는 사람>. 순간, 대각선 건너편에 앉아 그림책을 보고 있던 아이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어, 엄마 그 다음은 뭐야?
-길면 기차. 기차는 빠르다. 빠른 것은….
그때 우리를 태운 KTX가 터널 속으로 순식간에 빠져 들어간다. 철컹거리며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유독 심하게 귓가를 때린다. 철컹! 철컹! 그 소리가 마치 억지로 자물쇠를 걸고 문을 잠그는 것처럼 위협적으로 들려온다.
검은 차창에 비친 그와 나. 걱정스레 나의 뺨을 어루만지는 그는, 오래전 내가 영원을 맹세했던 그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