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정류장

류예지

by 전건우

그와 헤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차였다. 그가 자신을 배신하도록 교묘하게 상황을 연출했으니 차인 거나 다름없다. 표면적으로는 내가 매정하게 돌아선 꼴이 되었기에 구질구질하게 매달릴 수도 없게 되어 버렸다. 빠른 걸음으로 카페를 빠져나온 나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렸다.


마음껏 울고 싶었지만 결정적으로 눈물의 도화선이 될 만한 무언가가 부족했다. 그와 헤어졌다는 명백하기 이를 데 없는 이유 앞에서도 나는 우는 일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 날의 나는 냉동실 얼음처럼 견고했다. 일 그램의 허튼 수작도 틈입할 수 없을 정도로 냉정했다. 그러나 누군가 마음먹고 공격한다면 한 순간에 무너져버릴 정도로 ‘시방 위험한 상태’이기도 했다.


휘적휘적 거리를 쏘다니다가 솔이 부드러운 빗을 샀다. 디스플레이되어 있던 속옷이 너무 예뻐 그 길로 속옷 가게에 들어가 섹시하게 생긴 망사 소재의 브래지어와 팬티를 샀다. 이가 빠진 빗을 너무 오래 들고 다녀서, 밴드가 늘어지든 말든 입던 속옷만 줄곧 입는 것에 익숙해서, 새로운 물건들과 새로운 관계에 적응하는 일들이 하나같이 힘겹기만 해서 주저했던 일들을 한꺼번에 저질러보았다.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지만 버스는 꽤 오랜 시간 오지 않았다. 이 동네에 이사 온 후론 줄곧 904번 버스만을 타고 있다. 사람 탓에 미여 터지 건 말건, 단 한 번에 내가 사는 빌라 앞까지 데려다 주는 그 버스에 안전하게 몸을 맡기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고 보니 다른 노선의 버스는 단 한 번도 탈 생각을 하지 않았구나, 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새삼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언제나

나란 인간에게 닥쳐 올

일 퍼센트의 변수조차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짐작하지 못하고 나간 상황에서 마주한 그와의 이별, 아침나절 거울 앞에서 발견한 눈 밑의 미세한 주름이 그랬다. 가장 안전하고 이상적인 틀에서 머무르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는 이런 상황에 넌덜머리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변하지 않고 늘 그 자리에 뿌리 깊은 나무처럼 자리하고 있는 나란 사람에게 말이다.


달려오는 버스에 무작정 몸을 실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어떤 흐름에 몸을 내 맡기고 싶었다. 우연의 알레고리가 닿는 종착지까지 내처 달리고 싶었다. 관성을 최대한 역으로 이용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버스 맨 뒷자리 창가 옆에 앉았다. 버스 안에는 나를 비롯해 네 명의 여자 승객이 타고 있었다.


졸고 있는 여고생, 잠든 아기를 토닥거리는 여인, 희끗희끗한 새치가 보이는 중년의 아주머니, 운전사 바로 뒤, 의자에 앉아 기둥을 꼭 붙잡고 내릴 역을 놓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창밖을 주시하는 할머니 한 분. 그런데 처음으로 탄 버스에서 만난 그들에게서 묘한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러는 중에도 버스는 계속해서 낯선 도시의 풍경 속을 달리고 있었다.


어느 결에 화들짝 잠이 깬 여고생이 학원가 앞에서 내렸다. 여고생이 사라진 후 아이를 안은 젊은 여인이 시장 앞에서 내려 남편으로 보이는 눈매가 고운 남자를 만났다. 아주머니는 몇 정거장이 지난 은행 앞 사거리에서 중년의 배가 나온 신사를 만났다. 머리칼이 하얀 할머니가 자신처럼 주름이 깊게 팬 할아버지를 만난 것은 종점에 가까워졌을 무렵이었다.


버스에 혼자 남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그제야 주체할 수 없이 서러운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내내 그들이 친근하게 느껴졌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여고생은 내가 지나 온 과거 어느 한 지점 속의 나였다. 아이를 안은 젊은 여인과 아주머니, 그리고 할머니는 그와 함께 늙어가길 바랐던 미래 어느 시간 속의 나였다. 그들은 타인이면서 동시에 나였다.


그렇게 숨죽여 흐느끼고 있을 때쯤, 한 여자가 탔다. 여자 역시 뒷자리를 좋아하는지 우당탕탕 뛰어 오르는가 싶더니 거리낌 없이 내 옆에 앉았다. 쌕쌕거리며 숨 고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손에는 내가 좋아하는 바나나 우유가 들려 있었다. 흠흠거리며 옅은 헛기침을 내뱉는가 싶더니 익숙하게 생긴 손수건을 내밀며 말을 걸어왔다. 유감스럽게도, 내 슬픔을 다 알고 있다는 목소리였다.


“마셔.

달콤한 맛이 그리웠을 테니.

이왕이면 실컷 울어,

그렇게 울고 나야 내일부턴 아무렇지 않은 듯 웃게 될 테니까.”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그녀는 지금의 나보다 머리카락이 한 뼘이나 더 긴 미래의 나였다. 밝은 얼굴, 환한 미소. 나는 익숙하게 생긴-눈물이 많은 날 위해 그가 선물한-손수건에 대고 코를 휑, 하고 풀었다.


다행이야.


그렇게 버스는 낯선 시간들을 흘러 내가 처음으로 버스를 탔던 정류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버스는 다시 미래의 나를 태우고 흘러가기 시작했다. 버스의 종착점은 내가 처음으로 버스를 탔던 그 곳이었지만, 무언가 조금 변해버린 느낌이었다.



tumblr_ntzwql37Gt1smikoao1_1280 (1).jpg 사진 @ 손구용


슬픔이 반감기처럼 줄어드는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익숙하지만 더는 익숙하지 않은 풍경 속으로 데려다 줄 또 하나의 버스가 저 멀리 환한 빛을 내뿜으며 달려오는 모습을 마중하듯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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