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틀래치, 포클랜드

류예지

by 전건우



단기이건 장기이건, 출장에서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그녀와 나를 위한 요리 레시피를 짜는 일이다. 가볍게 샤워를 한 후 편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냉장고를 살핀다. 냉장실에는 어머니 집에서 한 달 전쯤 받아온 김치 몇 포기가 든 락앤락이 두툼하게 차지하고 있다. 뚜껑을 열지 않아도 시큼하게 익어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비주얼이다.


저녁을 거른 채 야근 중이라는 그녀의 연락을 받은 건 퇴근 무렵. 7시 언저리, 해는 서쪽 하늘에서 여전히 이글거리고 있다. 여름이 시작되던 무렵부터 그녀는 급격히 밥맛을 잃었다. 덕분에 처음 봤을 때 통통하게 올랐던 뱃살과 얼굴 살이 쏘옥 빠졌다.


그 무렵부터 나의 출장 역시 잦아졌다. 일 년에 서너 번 하던 일정이 배로 늘어난 것. 그녀는 그 점에 대해 딱히 불만은 표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잦은 출장을 그리 반기는 눈치도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귄 지 이제 반 년, 옆에 끼고 살며 온종일 얼굴만 봐도 부족할 시기이지 않은가.


“이주 후에 포클랜드로 출장 일정이 잡혔어. 기간은 삼주 정도. 회사에서도 미안해하더라고. 내 직급에 이제 마지막이지 않을까 싶네.”


친구의 결혼식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신부의 친구로 부케를 받기 위해 단상에 나온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당연히 남자친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결혼식 후 친구를 통해 그녀의 연락처를 받았고, 결국 남자친구도 없는 그녀가 신부의 간곡한 부탁으로 부케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서장은 이번 출장을 계기로 또다시 여자친구와 헤어지는 거 아니냐고 뼈 있는 농담 한 마디를 던졌다. 그도 그럴 것이 장기 출장을 갈 때마다 사귀던 사람과 이별했던 전력 탓인 듯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이번엔 다르니까요.”

“뭐가 달라. 돌부처라도 되어 기다려줄 것 같아?”

“아뇨.”

“근데 어떻게 확신해.”

“제가 기다려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전엔 이상하게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거든요.”


KakaoTalk_20160115_161706120.jpg 사진 @ 손구용



포클랜드로 떠나기 전 마지막 주말이 시작되던 금요일 밤, 그녀는 조금 푸석해진 얼굴로 오피스텔 초인종을 눌렀다. 일의 특성상 상대적으로 퇴근이 이른 나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해둔 상태였다. 구두를 벗은 그녀가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야. 김치볶음밥이 전부?”

“응. 입맛이 없을 때는 김치의 신맛이 밥맛을 돌게 하니까.”


문득 볶음밥의 맛을 좌우하는 건 다름 아닌 ‘파’에 있다고 했을 때 깜짝 놀라던 그녀의 얼굴이 새삼 떠올랐다.


첫 번째로 만났던 날 그녀는 의외로 조금 웃긴 구석이 있었다. 여성적일 줄 알았는데, 그것은 그녀라는 전체에서 단지 부분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번째로 만난 날은 맥주를 조금 마셨는데, 내내 그녀와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술기운 탓인 줄로만 알았다. 세 번째로 만난 날은 심야 영화를 봤는데, 내내 비가 와서였을까, 그녀를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네 번째로 만나기로 마음먹고, 그 만남을 기약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녀가 조금씩 특별한 존재로 와 닿기 시작했다. 현관문을 열기 전 옷매무새를 가다듬기 시작한 그 순간. 만날 장소를 정하고, 그 장소를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한 순간부터 왼쪽 가슴 한 구석 어딘가가 조금씩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천히 접시 위를 비워나가기 시작했다. 오물오물거리는 입술. 밥 한 알이 치마 위로 떨어지자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쓱 집어 입안에 밀어 넣는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개팅 첫날, 치킨 한 조각 마음 편히 먹지 못하면서 내숭을 떨던 그녀가 이제는 내 집에서, 내 옆에서 이따금 말간 맨얼굴로 잠을 자고 가기도 한다.


“이거 뇌물이다.”

“뇌물?”

“그래. 로비라고 해두지. 너랑 네고 하는 거야.”

“피-. 계약을 맺기엔 결격 사유가 너무 많아. 보자 보자, 일단 술이 빠졌어.”

“그럴 리가요. 아가씨.”


냉장고로 걸어가 와인을 꺼낸다. 얼마 전 선물 받은 잔까지. 있는 멋, 없는 멋 내보지만 결국 테이블 위는 파송송 계란탁 김치볶음밥.


“피노누아.”

“왠열.”


그녀와 나의 만찬은 이제야 시작됐다. 회사에선 ‘포클랜드, 함흥차사’라는 표현을 들먹거리며(인터넷도 거의 안 되고, 전화도 자주 끊기는 탓에, 할 수 있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다.) 환경적 척박함에 대해서만 누누이 말하지만, 밥을 먹으며 다시 한 번 그녀를 단속시킬 요량이다.


포클랜드의 척박함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될 달콤한 시간들에 대해.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하나씩, 천천히, 또박또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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