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예지
영화를 보고 난 후였다. H는 갑자기 남산에 가자고 했다. 아홉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우리의 시선 끝에는 남산타워가 몽환적인 빛을 내뿜고 있다. 그가 갑자기 남산을 호명했을 때 가슴이 울렁거렸다. 좋아요,라고 대답할 걸 알면서도 먼저 선수를 치는 그.
“밥 먹고 영화까지 봤는데, 이렇게 헤어지는 건 어쩐지 좀 야박하잖아요?”
“누가 뭐래요?”
샐쭉한 표정을 짓는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명동을 지나 충무로에 도착, 우리는 남산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구불구불 산길을 잘도 달렸다. 버스 안에는 중국 관광객이 유독 많았다. 문득 그들은 어떤 이유로 이 곳까지 오게 된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다 말고 옆 자리에 앉은 그를 슬쩍 건너다보았다. 단정한 눈매와, 부드러운 콧날, 꽉 다문 입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타워로 가는 입구에서 버스는 멈췄다. 그는 언덕배기를 올라가기 전, 운전기사에게 몇 시까지 버스가 운행하는지를 물었다. 열두 시까지라고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운전기사. 얼마나 많은 남녀가, 버스의 막차 시간을 물었을까.
우리,
열두 시 전에는 나와요,
마법의 시간이 끝나기 전에.
그는 경사길을 오르며 살짝 숨이 찬 목소리로 말했다. 길을 따라 늘어선 나무, 나무의 이파리와 이파리가 부딪치며 수런거리는 바람 소리를 냈다. 우리는 어느덧 코앞까지 와 닿은 남산타워를 목이 꺾어져라 올려다보았다. 그 아래에는 가족, 연인, 친구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 틈에 선 그와 나, 우리를 규정할 수 있는 단어는 무엇일까. 관계를 명명하는 수십 개의 단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를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는 단어는 없다. 타워의 불빛처럼 단지, 몽환적일, 뿐이다. 우리는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라운지에 슬며시 기댔다. 사람들의 비밀스러운 약속들로 채워진 자물쇠들이 철조망을 따라 빼곡하게 매달려 있다. 야경, 단순히 아름답다는 말로는 이 느낌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예지 씨, 사는 곳이 어디랬죠?"
"음, OOO이요."
"저기가 아마 예지 씨 동네일 거예요."
그는 불빛 어딘가를 가리켰다. H 씬요? 나는 정반대, 이 쪽. 그의 손끝을 따라 그가 살고 있는 동네를 바라보았다. 나무의 이파리들이 만들어대는 그림자 때문일까. 그가 사는 동네의 불빛이 한층 더 밝게 타올랐다.
“맥주 마셔요, 우리.”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좇다가, 다시 시선을 저 멀리 어느 한 곳으로 가져갔다. 어둠에도 눈이 있을까 봐. 아슬아슬한 빛을 품고 있는 서울의 야경은 묘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얼마쯤 그러고 있었을까. 어느 순간 서늘해지는 오른쪽 뺨. 화들짝 놀란 나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해맑다.
“무슨 생각했어요?”
당신에 대해서요, 하지만 이 말은 목구멍에 걸린 채로 나올 생각을 않는다. 대답은 않고 자꾸만 그의 얼굴을 살필 뿐이다. 머리를 긁적거리며 짓는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자꾸만 자꾸만 쳐다보게 된다.
“클라우드예요.”
우리는 사이좋게 캔을 땄다. 그러고는 어설프게 건배를 한 후, 꿈결처럼 펼쳐진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입사 초기 시절과 대학 시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미래를 꿈꾸었는지에 대해서도.
그는 대화의 말미에 내가 너무 편해서 좋다고 했다. 나도 물론 H 씨가 편해요,라고 모기만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차마, 좋아한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이런 내 말이 진심이듯, 그의 말이 진심이기만을 바랄 뿐.
“아까 본 영화,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 어땠어요?”
“글쎄요, 뭔가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어요.”
“이를테면?”
마지막에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소리쳤다. 눈물을 흘리며,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고. 사랑이라는 말을 그렇게 울면서 말할 수 있는 남자는 흔치 않다.
“예지 씨, 이 순간을 잊지 말아줄래요?”
“잊지 않을 거예요.”
“그나저나 나무가 만들어내는 그림자의 빛깔이 너무나 예뻐요. 그쵸?”
그 거 알아요? 당신도 예뻐요(그나저나 언제 고백할 건데요?). 맥주 한 캔에도 금방 얼굴이 빨개져버리는 그를 가리키며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얼굴, 빨개졌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남은 클라우드를 마시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그의 손이 나의 손등 위로 포개진다. 예고도 없이. 침도 삼킬 수 없을 만큼 목구멍이 저릿저릿. 그새 눈이라도 먼 것 일까. 발아래 야경이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애먼 스마트폰만 열었다 닫았다 열었다 닫았다. 11시 30분. 다행히 그와 나 사이에 아득하게 펼쳐진 마법의 시간은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