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예지
버스기사는 승객들을 향해 반복적으로 외쳤다. 광화문 네거리가 통제되면서 버스 진입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기존 노선대로 가지 못하고 우회할 예정이니 혹시 광화문으로 가려는 분이 있다면 지하철을 이용하는 게 훨씬 더 빠를 거라고.
마포대교를 지나 공덕역에 정차한 버스에 오른 40대 중반의 부부에게도 버스 기사는 같은 말을 도돌이표처럼 반복했다. 굽이 낮아 편해 보이는 운동화를 신은 여자분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듯 대답했다.
“괜찮아요.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면 되죠, 뭐.”
광화문으로 가까워질수록 승객의 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평소라면 괜찮을 테지만, 승객 수가 줄면서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차라, 여정의 동지라도 만난 양 가슴을 쓸어내렸다. 매일 이용하는 버스 노선은 아니었지만, 마포대교를 지나 공덕역을 거쳐 충정로로 이윽고 광화문으로 이르는 그 길은 내가 대학 시절 자주 애용하는 노선이었다. 나는 이 길을 거쳐 토익 점수를 올리고자 어학원을 다녔고, 예술을 꿈꾸던 너와 함께 알랭 레네 영화를 관람했으며, 가끔 친구들과 가을날의 덕수궁을 거닐었다.
하지만 그날의 그 길은 조금 낯설었다. 어쩐 일일까. 뭔가 특별한 일을 해내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어떤 ‘도취’와도 같은 감정이어서 뭐라고 정확하게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마치, 꼭, 누군가 차갑게 식어버린 뺨을 찬찬히 어루만져주는 듯한 따스하면서도 편안한 온기를 느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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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동네를 벗어날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왜 하필 다 늦은 저녁에 광화문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토요일 저녁, 이제는 함께할 너도 없이, 주말 드라마만 주야장천 보고 있는 30대 직장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과연 무엇일까. 고민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일단 가보자, 라는 마음이었고, 내딛는 발걸음은 어쩐지 가벼웠으므로.
20대에는 정치 같은 게 내 삶을 크게 좌우할 리가 없었다. 나와 너는 대체로 그랬다. 정치도, 경제도 틈입할 수 없는 견고한 ‘우리’라는 성 안에서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제4 세계의 언어를 속삭이기에 바빴으니까. 하지만 30대에 본격적으로 접어들면서부터 화제는 바뀌었다. 빈번하게 정치적인 것에 골몰했다. 그것은 네가 더 사랑하느냐, 혹은 내가 덜 사랑하느냐 하는 문제에서부터, 누가 먼저(아니 될 수 있으면 '네'가 먼저) 예술은 주머니 속에 꼬깃꼬깃 접어두고 안정적인 직장에 안착해 남편(아내)이 되고 부모가 되는 삶을 영위했으면 좋겠다는 문제로까지.
때로는 지지고 볶고 싸우는 와중에 거짓처럼 진실을 들먹였다. '다들 그렇게 살아, 더 특별할 없는 것이 인생이야', 라며 일갈해버리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토라졌다. 그러고 나면 나와 너는 ‘우리’라는 공동체를 쉽사리 버리고 하나의 개인으로 돌아가 별 볼일 없어진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수그리고 헤어졌다. 단단하게 얽혀 있던 것들이 아무렇지 않게 풀어헤쳐졌고, 와해되었다. 너와 나의 굳건했던 연결고리가 어느 순간 뚝, 하고 끊어졌다.
어쨌건 분주한 나날을 거친 끝에 대부분의 지인들을 결혼했고, 아이를 낳았으며, 몇몇은 결혼을 전제로/혹은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채로 오직 현재의 연애를 이어갔다. 그런데 왜 나만 그 언저리에서 좌절되었을까. 과연 좌절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이 적절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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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집회를 예고하는 뉴스를 봤을 때, 뉴스의 영상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쉽게, 간단하게, 정리해버리는 것이 옳지 않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그랬다. 아이를 잃어버린 사람, 아이를 잃은 이유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 직장을 잃은 사람, 직장을 잃고 새 일 자리를 구하는 사람, 휴식을 잃고 거리로 나온 사람, 그렇게 희망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사람들…. 어른, 아이를 가리지 않았다. 특히 어린아이들의 손에 들린 붉은색 피켓은 어른들을 절망하게 만들었다.
헌데 그들 모두의 손에 환한 촛불이 들려 있었다. 그들은 단 하나의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잃게 만든 사람, 조직, 체계, 시스템은 가차 없이 물러가라고. 나는 왠지 각자의 사정, 곡진한 과정을 거쳐 광장으로 삼삼오오 모여들었을 그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 잠시나마 머무르고 싶었다. 우리는 실은 소중한 단 하나를 잃어버림으로써 모든 것을 잃어버린 공통분모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전부였다. 내겐.
어느 순간부터 무언가가 되어야겠다는 간절함이 사라져 버렸다. '열정', '꿈' 같은 손에 잡히지 않는 단어를 입에 담는 것이 무서웠다. 실체가 불명확할수록 그것을 꼭 움켜쥐고 싶은 열망은 강해지기 마련이었으니까. 스무 살, 너를 처음으로 만난 대학, 교양 강의가 진행되던 봄날의 대강의실에서였을 것이다. 이제 막 마흔을 넘어선 전공 교수는 콧날 위에 얹힌 동그란 안경을 검지 손가락으로 추어올리며 말했다. 그의 눈빛은 꼿꼿하게 학생들을 응시한 채였다. 다정함과 냉정함이 교차하는 그의 목소리는 마이크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강의실을 먹먹하게 울렸다.
“나는 꿈꾸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현실로 도망을 쳤습니다.”
자기 고백적인 한 마디에, 우리 모두는 그 말이 함의한 뜻을 백 퍼센트 이해한다고 자신할 수 없었으나 본능처럼 몸을 떨었던 것 같다. 그때는 꿈만큼이나 실체가 분명하고 명징한 단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날의 나는 확인해야만 했다. 내 안에 무언가가 아직은 남아 있다는 사실을, 그것이 촛불처럼 다시 환하게 타오르길 바랐다. 그것은 사실 ‘너’라는 존재를 잃게 된 후부터 줄곧 내 안에 남은 단 하나의 화두였다. 그 광장에는 모르긴 몰라도 ‘너’를 잃어버린 ‘나’와 같은 사람도 있지 않을까. 부끄러움도 잠시 잊었다. 원대한 포부, 거대한 상징, 비장한 신념 따윈 없어도 그만이었다. 그저 ‘너’라는 존재를 상실했다는 이유만으로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나’와 같은 사람도 있어야겠기에.
버스 기사는 아현초등학교 앞에서 우회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의 사람들이 내렸고, 일부의 사람들은 우회하는 버스에 그대로 남았다. 버스는 느릿느릿 멀어져 갔다.
남겨진 우리는 적당한 보폭을 유지하며 걸어나갔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단지 어떤 상실을 겪은 이유로, 자신의 의지를 발휘해 광장으로 향하는 행위 자체가 주는 묘한 안도감을. 해는 이미 저문 상태였지만, 하늘에는 손톱만 한 달이 떠 있었다. 우리의 걸음은 더뎠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굽이 편한 운동화를 신고 내 앞에서 당당하게 걸어가는 여자분의 말씀처럼 우리는 갈 수 있는 데까지만 가면 됐으니까. 광장으로 가까워질수록 빛은 더욱 환하게 타오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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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느 결에 잠시 꿈을 꾸었다.
광장에서 잃어버린 너를 다시 만나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시절 속 우리 함께했던 슬프지만 아름다운 시간을.
* 제목은 기형도 시인의 '빈집'에서 따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