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예지
어르신.
그녀는 시골이라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슬레이트 지붕의 집 앞에 서 있었습니다. 마당엔 두 그루의 감나무가, 한 그루의 대추나무 허리에는 고무줄 늘어진 팬티와 닳아빠진 브래지어가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습니다.
서로에 대한 굳은 사랑으로 지독한 가난의 상처를 보상받았던 그 집에서의 삶은 너무나 남루했지만, 그 보다 더 큰 행복은 욕심낸 적이 없기에, 이대로 가는 건 너무 억울하다고 말했던 그녀의 마지막 절규가 잠자고 있다던 집이었습니다.
어르신.
저는 어제 핏덩이를 두고 차마 눈을 감지 못하는 한 젊은 여인의 손목을 매정하게 그러잡고 나왔습니다. 그래요, 이제야말로 당신이 말하던 그 방법을 알게 됐나 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가슴은 하나 아프지 않은데, 눈물이 흐르더란 말입니다. 이제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무언가 아련히 생각날 것 같기도 하고. 가끔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울음이 나는 건 어째서일까요.
어르신.
가끔 옛날의 당신이 그러했던 대로 이렇게 한 번씩 저 강 너머의 세상 속으로 가야 할 일이 생길 때면 저의 마음은 너무나 적요로워 집니다. 그리고 오늘의 그녀처럼, 미련한 오기를 부리는 자들이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돌아설 수 있도록 말없이 기다려주어야 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더는 빨래 방망이를 두드려가며 닳은 브래지어를 빨고 있는 엄마의 여윈 얼굴을 쓰다듬을 수 없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거뭇한 수염이 난 아버지의 구부정한 어깨를 주물러 줄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을,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녀의 비루한 생이 읽힐 때 즈음, 공기를 가르고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알고 있나요? 저는 무얼 말하느냐 했지요. 그녀는 저곳에서의 모든 기억들, 이라고 짧게 답했습니다. 저는 단지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제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를요. 저는 모든 것을 잊었습니다. ‘강’에 손을 담가버린 거지요. 백지의 상태가 되어버린 저에게 당신은 말했습니다. ‘강’에 손을 담그지 않았다면, 저곳의 기억 때문에 이곳의 생이 견디기 어려울 거라고요.
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도 두려움을 아느냐고, 자신은 그 강에 손을 담그지 않았다 하였지요. 그리고 당돌하게도 잊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뭔지 아느냐 물었습니다. 그녀의 눈빛은 촉촉이 젖어 들어갔습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던 제게 그녀는 시간이라고 답했습니다. 시간이라는 건, 굳이 잊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잊는 방법을 터득하게 해준다고요. 그때, 자신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을 때, 아버지가 처음으로 눈물을 보이면서 그랬다 하더군요. 잊어라, 아팠던 모든 기억 잊고, 훨훨 날아가거라. 하지만 자신은 아버지의 뜻대로, 우리들의 뜻대로 그럴 수 없었다고요. 어떻게 내가 그들의 소중한 딸이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겠느냐고요. 자신은 이렇게 기억과 추억으로 만들어진 사람인데. 그게 바로 온전한 자신인데, 어찌 자신을 자신으로서 살아있게 했던 모든 기억을 부술 수 있겠느냐고요. 그녀의 말은, 새삼 제가 저 세상에서 숨 쉬고 있었을 때 어떤 사람이었을까, 라는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일은 온전히 저의 근원을 흔드는 일이었습니다.
어르신.
어디를 헤매고 계신 것입니까? 그 날 당신은 저 너머의 한 아이를 본 이후로 사라지셨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건 아닌가요? 이를테면, 그녀가 지금 저렇게 넘어서지 못할 파란대문 앞에 망연히 서 있는 이유를요. 저 역시 어찌하지 못하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말이지요.
우리는 이를테면
이곳에서 만질 수 없는
저곳의 온기를…
너무도 절실히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