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디는 어린시절부터 몸이 약했습니다. 5살때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고생하였죠. 그리고 그 병은 평생동안 가우디를 괴롭혔습니다. 그 괴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그는 매일 같이 산책을 하였습니다. 그 시간을 통해 가우디는 '관찰'이라는 아이템을 얻게 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비밀을 밝혀내는 힘이었죠. 그는 대장장이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철구조물을 이해하고 공간감각을 배웠습니다. 고향 땅의 자연을 통해 새들의 지저귐과 지중해의 태양과 바다의 소리를 들었죠. 그에게 아버지와 자연은 건축가가 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가이드님 아버지때문에 가우디는 건축가가 된건가요?"
"그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가우디에게 건축가의 길을 가게 한 것은 단 한번의 경험이었습니다. 가우디의 10대시절 그는 매우 소심하고 예민하였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주변만 맴돌고 다가서지 못하는 아웃사이더에 전형이었죠. 그랬던 그가 우연히 그렸던 그림 하나를 친구가 보게 되었고 이렇게 말하였죠. '가우디! 이거 니가 그린거야? 이 정도면 건축가가 되어도 충분하겠다!'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얼어 붙어 있었던 가우디의 마음이 녹아 내립니다. 친구의 칭찬이 가우디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죠. 그리고 그는 아버지께 말합니다. '아버지 저는 건축가가 되고 싶어요' 가우디의 아버지 프란체스는 자신의 아들이 대장장이가 되는 것보다 건축가가 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가우디가 공부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하게 되죠.
가우디가 활동했던 19세기는 바르셀로나가 번영했던 시기입니다. 유럽에서 부자동네 중 하나인 바르셀로나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 흔적이 에이샴플레 지역에 남겨져 있습니다. 에이샴플레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오늘 우리가 만났던 그라시아 거리입니다. 까사밀라와 까사바트요같은 작품이 만들어진 배경에는 바르셀로나의 '부'가 있었습니다. 결국 상업이 발전하는 곳에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는 곳에 돈이 모이고, 돈이 모이는 곳에 예술이 꽃피웁니다. 로마, 피렌체, 파리, 그리고 바르셀로나가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가이드님 그러면 가우디가 18세기에 태어났다면 지금처럼 유명하지 않았겠죠?"
"역사에 만약을 적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아마도 지금 처럼 유명하기는 어려울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18세기 바르셀로나는 암흑기 였기 때문입니다. 유럽에 왕위계승전쟁을 통해 스페인의 주인이 부르봉왕가로 바뀌었기 때문이었죠. 부르봉왕가는 마드리드 중심으로 도시를 발전시키었고, 그로인해 바르셀로나는 차별적인 정책으로 쇠퇴를 거듭했습니다. 그래서, 가우디가 18세기에 태어났다면 지금처럼 유명한 건축가가 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가우디의 성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것은 2가지입니다. 19세기에 태어났다는 것과 구엘을 만났다는 것."
"가이드님은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는건 가요?"
"맞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인재여도 시대적 환경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빈치가 정통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그 시대의 모든 천재를 뛰어넘는 걸작들을 만들 수 있었던 배경에는 활자인쇄술이 있었습니다. 1440년경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자인쇄술을 통해 다양한 책들이 출간됩니다. 그리고 그 활자인쇄술에 혜택을 마음껏 누린 사람이 다빈치입니다. 다빈치가 만약 14세기에 태어났다면 그는 평생 서자 출신의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방황하는 청춘의 삶을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다양한 책들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책들은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책들 뿐이었고, 그러한 책들은 값비쌀 뿐만 아니라, 정식학교에서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서자 출신인 그는 넘볼수 없는 영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15세기에 태어났고 다양한 책들을 읽을 수 있는 혜택을 마음껏 누렸습니다. 그가 왼손잡이 라는 사실도 그가 정식교육을 받지 못했음을 우리로 알게 합니다. 정식교육을 받은 자제들은 모두 오른손 잡이였기 때문이죠. 시대와 환경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가우디는 탄탄대로 인생을 살았나요?"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가우디는 시련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바르셀로나 건축대학교에 입하하여 공부할때, 사랑하는 형이 25섯의 나이로 사망을 합니다. 그리고 형의 죽음에 삶의 의욕을 잃은 어머니도 3개월뒤에 사망을 하죠. 그와 같은 부고가 가우디의 인생을 절망케 합니다. 그리고 그때 그는 종교에 심취하게 됩니다. 보른지구에있는 산타마리아 델 마르성당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죠. 그는 간절히 기도합니다. 고통의 시간을 이겨낼 힘을 주시라고. 그리고 그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적어두었습니다. '이겨내기 위해 미친듯 일해야 한다' 아마도 그가 워커홀릭이 되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가족을 잃은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그는 미친듯이 일하는것을 선택한것이죠. 아니, 어쩌면 그렇게라도 슬픔을 지워내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가우디는 평생 일만하고 살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우디는 젊은시절 멋쟁이였습니다. 양복을 입고 마차를 타며, 오페라를 즐겼죠.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마타로 노동자 단지에서 만난 페피타라는 여성을 사랑했습니다. 프랑스어 교사였던 그녀는 하얀 피부에 푸른눈동자 밝은 갈색의 머릿결이 매력적인 여성이었습니다. 가우디는 5년동안 그녀를 향한 마음을 표현했지만, 그녀는 가우디를 받아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우디가 존경스런 사람이였지만, 매력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밝고 친근하고 대화가 잘 되는 사람은 아니었던 거죠. 그래서 결국 가우디와 페피타는 이루어 질 수 없었습니다. 그 시간을 경험하며, 그는 이렇게 말하였죠. '만일 페피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그는 그때부터 독신을 다짐합니다. 건축에 올인하는 삶을 결정하게 된 사건입니다."
"그러한 시간들을 통해 종교건축에 심취하게 된건가요?"
"맞습니다. 가우디에 인생에 다가온 시련과 고통이 그를 종교건축에 더 심취하게 만들었습니다. 성가족성당 역시 그의 그러한 마음이 건축을 통해 잘 표현되어있죠."
"그럼 가우디가 1대 건축가로 성가족성당을 만든걸까요?"
"아닙니다. 가우디는 2대 건축가로 성가족성당을 만들었습니다. 성가족성당의 역사는 1882년 보카베야라는 출판업자로 부터 시작됩니다. 물질 만능시대를 살아가는 바르셀로나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지식인들이 모여 시작했습니다. 물질이 대신할 수 없는 정신을 건축을 통해 표현하고 싶어하였죠.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모두 함께 모여 기도하는 공간. 성스러운 가족인 아기예수, 마리아, 요셉을 닮아가는 바르셀로나가 되기를 바랬죠. 물질이 가족을 해체하고 사회문제를 양산하는 것을 경험했던 시대의 지성인들이 반성의 마음으로 만든 공간이 성가족 성당입니다. 성가족처럼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자는 마음이 담긴것이죠. 그 좋은 취지를 기쁘게 받아들인 건축가가 가우디의 스승, 비야르 였습니다."
"왜 비야르가 계속 성당을 만들지 못했나요?"
"그 이유는 성당측에 있습니다. 1882년 지하예배당을 만드는 과정에서 자재를 두고 성당측과 비야르가 대치를 하였죠. 값산 자재를 사용하자는 성당측과 중요한 부분이니 좋은 자재를 사용하자는 비야르의 입장이 팽팽하게 맞섰죠. 그리고, 그러한 갈등에 회의감을 느낀 비야르가 1883년 사임을 합니다. 자신의 제자 가우디를 2대건축가로 추천하면서. 결국, 비야르는 1년의 시간만 성가족성당과 함께한 건축가가 됩니다. 가우디는 스승의 설계도면을 존중했지만, 더 좋은 성당을 만들기 위해 수정합니다. 평범한 성당을 만들려고 했던 비야르의 도면이 가우디는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가족성당이 바르셀로나를 상징하는 성당이 되기를 바라며 그는 독특한 성당을 설계하였죠."
"성당측이 좋아했나요?"
"성당측은 너무나 싫어했습니다. 비야르가 예상한 성당보다 훨씬 더 많은 건축예산이 필요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가우디는 비야르보다 더 단단하고 큰 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성당측의 어떠한 회유에도 흔들림 없이 자신이 설계한 대로 건축을 이어갔습니다. 건축예산이 부족하면,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면서까지 성당건축을 이어갈 정도로 열정적이었죠. 18개의 탑, 3개의 문, 성서를 바탕으로 한 돌조각등. 천문학적인 예산이 들어가는 성당건축에 성당측은 두손 두발 다 들었죠. 가우디의 재산과 시민들의 기부금을 통해 조금씩 만들어졌기에 가우디가 살아있을때, 만든 작품은 탄생의문과 탑1개뿐입니다. 43년동안 만든 건축이 문하나와 탑 1나였던 거죠."
"그러면, 건축 실패가 아닌가요?"
"그 당시 결과로만 보았을때는, 실패라고 할수 있습니다. 피카소나 조지오엘도 가우디의 작품을 비웃을 정도로 볼품이 없었습니다. 많은 예산을 투자하고 만든것 치고는 엉성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가 설계한 대로 현재까지 지어진 건축을 눈앞에서 보시면, 실패가 아니라 과정이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가우디의 결과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사실은 가우디 꿈의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누군가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고 하지만, 누군가는 이루어 질 수 있는 꿈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성가족성당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가우디는 이렇게 말했죠.'나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슬프게도 나는 내 손으로 이 성당을 완성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의 후손들이, 다음 건축가가 이 건축물을 완성시키고 이곳에 빛을 내려주리라'
"가우디는 성당을 완공하지 못할것을 알고 있었나요?"
"가우디는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생애동안 완성하기에 자신의 꿈의 크기가 너무다 크다는 사실을 말이죠. 하지만 가우디는 또 하나를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꿈은 사라지지 않고 후손들을 통해 반드시 이루어질 것 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가우디는 어떻게 죽게 되었나요?"
"1926년 6월 7일. 그는 미사를 드리기 위해 성당을 향했습니다. 고딕지구에 있는 산펠립네리성당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죠. 바람이 많이 불었던 걸까요. 그의 몸이 휘청거렸던 걸까요. 그날 따라 그는 불안하게 걸었습니다. 전차들이 다니는 선로를 걷다 빠르게 지나가는 전차를 보고 놀라 가까스로 피했을 피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쿵' 반대편에서 30번 트램이 가우디를 덮쳤습니다. 가우디는 그대로 꼬꾸라져 쓰러졌습니다. 머리에는 피가 흘렀죠. 30번 트램의 열차 운전사는 가우디를 보고 당황하였지만, 행색이 초라한 가우디를 한쪽에 버려두고 이내 출발해버렸습니다. 주변에서 가우디를 발견한 시민들이 뛰어와 가우디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는 의식이 없었습니다. 지나가던 택시들을 잡아 가우디를 병원으로 이송하려 하였지만, 택시들을 가우디를 거부합니다. 행색이 초라했기에, 부랑자 같아 보였기에, 가난해 보였기에, 무려 3번이나 택시기사들은 가우디를 외면하고 떠나 버립니다. 4번째 택시기사를 붙들어 간신히 가우디를 병원으로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 시각 성당에서는 난리가 났죠. 미사를 끝내고 들어올 시간이 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가우디를 걱정한 파레스 신부는 모든 지인들에게 연락을 취하였습니다. 밤이 깊어 새벽이 되었을때, 그에게 한통의 전화가 걸려옵니다. '부랑자 같은 사람 한명이 있는데, 혹시 찾는 사람이 아닌지 모르겠네.' 전화기를 내 던지고 신부는 산타 크레우 병원으로 향했죠. 그곳에서 발견한 가우디는 산송장과 다름 없었습니다. 병원에서도 중환자인 가우디를 행색이 초라하다는 이유로 제대로 조취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우디는 신부를 향해 말했죠.
'나의 옷차림을 보고 판단하는 이들에게, 그래서 이 거지 같은 가우디가 이런 곳에서 죽는다는 걸 보여주게 해라.' 6월 10일. 그는 결국 숨을 거두게 됩니다."
"아니, 어떻게 훌륭한 건축가를 그렇게 대했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가우디의 마지막 말이 우리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옷차림을 보고 판단하는 이들에게, 그래서 이 거지같은 가우디가 이런 곳에서 죽는다는 걸 보여주게 해라' 가우디의 시대와 우리시대가 무엇이 다를까요? 저는 같다고 생각합니다. 물질 만능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세계이죠. 사람보다 돈이 더 귀하게 대접받는 시대이고요. 어쩌면 가우디가 성가족성당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돈이 대신할 수 없는 숭고한 정신적인 것들이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숭고한 것들이라면, 어떤 것들을 말하는 거죠?
"직접 성당을 보며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탄생의 문으로 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