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하면서 막막했던 경험 있으신가요?
글감이 떠오르지 않아 빈 화면만 바라본 적 없으셨나요?
혹시 글쓰기는 원래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계시진 않나요?
사실 이 질문들은 모두 제가 500일 넘게 글을 쓰는 동안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던졌던 말입니다.
글감이 없다는 이유로, 또는 내 글이 너무 평범하다는 생각에 많은 날을 망설이며 보냈습니다.
글쓰기가 어렵다는 생각은 글을 계속 쓰는 동안에도 쉽게 떨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답답함 속에서도 제게 길을 열어준 건
책과 롤 모델이었습니다. 그들이 써낸 문장은
저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었습니다.
혹시 요즘 내 글이 매일 비슷하다고 느껴지고,
글감이 바닥났다는 생각이 드신다면 하나의 롤 모델을 정해 보세요. 그리고 그 작가의 문장을
따라 써 보세요.
그 과정을 통해 새로운 문체, 새로운 시선,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글감이 자연스레 떠오르게 될 것입니다.
저 역시 글쓰기 슬럼프가 깊어질 때마다 그런 방식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작가 클레어 키건 덕분에 또 한 번의 슬럼프를 이겨낼 수 있었죠.
그 과정을 나누고자 합니다.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 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는 문장을 보며
자연의 변화, 계절의 흐름을 떠올렸다.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린다는 건 무언가 되돌릴 수 없는 변화가 시작되었음을 뜻하는 것 같았다.
11월의 바람이 나무를 벗기듯 지나간다는 것은
어떤 강압적인 힘에 의해 순수하고 여린 존재가 맨몸으로 드러나게 되는 순간처럼 느껴졌다.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 강을 가득 채운 빗물…
그것들은 누군가의 눈물과 상처 같았다.
하지만 이 문장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된 건 책을 세 번이나 읽고 난 뒤였다.
작가는 이 첫 문단을 통해 임신한 채 물에 뛰어든,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을 암시하고 있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고, 솔직히 말해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모든 글이 다 이해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란 걸.
때로는 그저 느껴야 하는 글도 있다는 걸.
감정과 직관이 필요한 문장들을 통해 글을 ‘읽는 법’뿐 아니라 글을 ‘느끼는 법’을 배웠다.
이 책은 1985년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막달레나 세탁소’라는 착취 기관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조용한 일상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숨겨진 상처와 복선이 스토리에 녹아져 있다.
키건의 문장을 따라 쓰며 저는 그 이야기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써 보고 싶어 졌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 보았습니다.
10월에 하늘이 어둠으로 바래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이 흘렀고
몸은 발가벗겨져 있었다. 나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어두움 속에서 뉴타운 불빛만이 창을 통해 비추어 보일 뿐이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물이 차량 맞게 집 안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힘들었지만 그럭저럭 견디고 있었다.
우시장, 커피숍, 슈퍼마켓, 술집에는 저마다 사람들이 모여추 위에 대해, 비에 대해 무의미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엄마들은 빨래를 내다 걸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추위 속에서 조용히 기도 중이었다.
이 문장은 클레어 키건이 바라본 바깥세상 대신,
그 착취당한 여성의 눈으로 본 세상을 상상하며 써 본 글입니다.
작가의 시선을 뒤집는 것, 그것이 바로
제가 생각하는 ‘훔치는 글쓰기’입니다.
3인칭 시점의 문장을 1인칭으로 바꿔 보거나 사건의 배경이 된 장소를 한국으로 옮겨와 상상해 보는 것도 훌륭한 연습이 됩니다.
시점, 시간, 공간이 바뀌면 글의 분위기와 감정선도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매일 같은 문장, 같은 흐름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결국, 글쓰기를 하는 사람은
다양한 책을 읽고, 다양한 문장을 따라 써 보며,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 가는 존재입니다.
좋은 작가는 곧 좋은 독자이니까요.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면 그의 문장을 따라 써 보세요.
그 문장을 훔치고, 자신의 언어로 다시 써 보는 동안 슬럼프는 조금씩 옅어지고 새로운 이야기들이 피어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 글쓰기를 하며 점점 더 실감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글이 막혔다면, 누군가의 문장을 조용히 따라 써 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