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by 송아론

내 자존감은 당신에게서부터 피어나요. 전화를 할 때마다 흔들리는 정체성은 매일 안개와 같아요. 나는 오늘도 그것을 걷어내기 위해 아스피린을 삼켰어요. 미간을 죽이고 차디찬 바닥에 누워 꺼져가고 있는 나를 돌아봐요. 가끔은 이대로 정말 사라지는 게 아닐까 생각하지만, 매일 당신 꿈으로 눈을 떠요. 다시는 전화 따위 하지 않겠다, 잘살겠다, 다짐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허망하게 무너져요. 그럴 때마다 들리는 자조적인 웃음소리에 또다시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요. 여기는 어디인가요? 정체된 시간 속에 나는 아직도 헤매고 있네요.


당신, 당신은 내 모습을 기억 하나요? 나는 선명하다 못해 생생해 미칠 지경이에요.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아 이 마음이 괴로운 건 언제나 나뿐이에요. 며칠 전 전화를 받은 당신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낯설었어요. 멀어진 우리의 관계가 바로 그것이었죠. 그 목소리를 들은 나는 혼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어요. 마치 별이 된 다음에 부서지는 은하가 되는 것 같았어요. 그럼에도 더욱더 담대한 당신. 당신은 이런 내 고통을 이해할 수 있나요? 창문에 하나둘 빗줄기가 닿아 터져 나갈 때마다 당신과 나의 파편들이 떠올라 고개를 숙이곤 하는 나를 이해할 수 있나요? 당신은 내게 너무나도 큰 짐을 주고 떠났어요. 그것은 버리거나 덜어주거나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그것이 쉽게 잊어질 상처 따위라면 회복할 때까지만 기다리면 되잖아요.


당신, 나보다 더 자신을 사랑하는 당신. 당신은 지금 어느 세계에 도달해 있나요. 그 세계에 발을 디뎌 잠시나마 당신을 바라고픈 내 심정이 이해되지는 않나요? 나는 당신에게 이런 고백을 할 때마다 계속해서 부서지고 있답니다. 그럼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당신을 아니 섭섭할 뿐이에요. 나는 이미 당신 안에서 자그마한 용량일 뿐이거든요.


사실 나는 당신과 헤어진 뒤 당신이 그 누구를 만난다 해도 미소 지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심지어 내가 선물해준 것들로 예쁘게 차려입고 누군가를 만난다면 정말 기쁠 거 같았어요. 하지만 뒤늦게 깨달았죠. 그것은 당신을 향한 내 마음에 회피라는 것을. 당신, 그 누구보다도 어여쁜 당신. 부탁하는데 그 어여쁜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말라고 하면 제 헛된 욕심일까요? 이제 더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데 누군가에게 당신이 보인다는 것이 제겐 너무나도 괴로운 일이네요.


예전에 제가 말했죠? 나는 이제 당신에게 좋은 친구로 남고 싶다고. 하지만 고백하건대 그건 당신에 대한 내 마음에 변화가 왔기 때문이 아니에요. 당신은 내게 있어 오직 그대로인데, 당신이 보기엔 내가 너무나 많이 부서졌고 파괴되어버렸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좋아하던 예전의 ‘나’는 더 이상 여기에 없죠.


당신, 예전의 나를 좋아했던 당신. 저는 지금 헤어지던 날 밤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답니다. 그날 밤 장미꽃 조화와 담배 한 갑을 가지고 이 담배를 다 태울 때까지만 기다리자고 마음먹었는데 그렇게 하지를 못했네요. 당신이 아파트 위에서 아직도 가지 않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것만 같아 두려웠거든요.


당신, 꽃처럼 남겨진 당신. 제가 이렇게 당신에게 계속 소설을 포장한 글을 써도 조금만 이해해 주세요. 예전보다 지금 더 무뎌지고 있잖아요. 언젠가는 연기처럼 사라질 마음들이에요. 그러니까, 조금만, 조금만, 더 제 글을 읽어주세요. 아무렇지도 않게 눈 뜰 날이 오면 다시는 붙여지지 않을 편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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