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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2] 독박살림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걸린 딸
저녁 7시. 나는 상담실 의자에 앉아 피곤한 얼굴로 기지개를 켰다. 원장님은 맞은편에 앉아 상담일지를 쓰고 있었다. 아직 퇴근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마지막 상담이 하나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내가 출근한 첫날 때 봤던 일곱 명의 가족. 다시는 안 올 것처럼 상담소를 나갔던 그들이 무슨 일인지 오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긴장이 되면서도 지루해 하품을 여러 차례 했다. 저녁을 먹어서 그런지 식곤증도 올라왔다.
“아 맞다!”
나는 번뜩 소리를 높였다.
“근데 오늘 오기로 한 가족 중에 내담자가 누구예요?”
그러고 보니 내담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던 나였나.
“연희라고, 이 아이야.”
원장님은 내게 내담자의 상담일지를 건네줬다. 나이는 27살. 여성이었다.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상담소 문을 박차고 나오던 가족을 떠올려 봤지만 감히 잡히지 않았다.
“좀 통통한 여자 있었잖아. 못 봤어?”
“통통한 여자…?”
나는 입술을 매만지다, 드디어 생각이 났다. 나이 드신 할머니와 비교적 젊은 여성이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렸고, 그 뒤에 또 한 명의 여자가 있었다. 가장 늦게 상담소를 나온 사람. 상대적으로 주눅이 들어 있던 그녀가 내담자였다.
“무슨 일 때문에 상담을 받게 된 거예요?”
기다리는 시간 동안 원장님에게 내담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니까 그녀의 아버지는 장남으로 형제가 총 4명이었다. 집안에 손자가 한 명도 없어 같이 사는 친할머니는 내담자에게 네가 장남이나 마찬가지니 모든 집안일을 하라고 했다. 그때 그녀의 나이가 15살이었다.
그녀는 그때부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청소, 설거지, 빨래는 기본이거니와 명절에 제사 음식을 만드는 일까지 했다. 문제는 그녀를 도와주는 가족이 엄마 빼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집에 작은고모와 삼촌이 있었으나,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 또 큰고모가 오면 짧으면 며칠, 길게는 일주일을 놀고 갔는데, 그때마다 고모들 밥상을 차려주는 것도 그녀의 일이었다. 친할머니는 자식들이 와서 놀다 가는 게 좋기만 했지, 손녀딸의 고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가 버텼던 것은 불쌍한 엄마 때문이었다. 엄마가 일을 마치고서 밤늦게까지 살림을 하는 게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엄마를 도와주자는 마음으로 참고 집안일을 했는데, 가면 갈수록 친가는 부당한 대우를 했다.
그중에서 그녀를 가장 힘들게 한 사람이 바로 삼촌이었다. 삼촌은 이혼한 후 자녀들을 데리고 형님(내담자의 아버지) 집에 얹혀살았는데, 조카인 그녀에게 자기 밥은 물론 사촌동생 밥까지 차리게 했다. 또 커피와 물을 가지고 오라고 시키는 등, 그녀의 말로는 종 부리듯 대했다고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이 고생하는 건 알고 있었으나, 장남이다 보니 가족에게 불평하기를 무척이나 꺼렸다. 그런 일들이 수년 동안 이어지면서 그녀는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학교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백내장까지 걸려 눈알이 이상하다며 아이들로부터 왕따까지 당했다. 다행히 수술했지만, 그 후로도 계속 따돌림을 받았다. 그러던 중학교 3학년의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지하철을 타고 가던 중 갑자기 심장이 쿵쾅쿵쾅 거리더니 눈앞이 깜깜하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정신을 잃고 119에 실려 갔다.
공황장애였다. 그 후로 그녀는 대중교통을 타지 못하는 것은 물론, 좁은 공간이나 엘리베이터도 이용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다년간 받았던 스트레스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로 발전해 더는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친가는 내담자가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모든 것이 자기들 때문인데도 그녀에게 정신과 치료만 받게 해 10년간이나 약을 복용하게 했다. 그녀는 정신과 약을 먹지 않으면 환청, 환시, 심장이 쿵쾅거리는 증상, 누군가가 나를 해치려 한다는 피해망상으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눈에 보이는가 하면, 눈이 여러 개 달린 귀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걸 느끼기도 했다. 그렇게 증상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부모님이 딸을 상담소에 데리고 온 것이었다.
“와… 말도 안 돼….”
나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답답함을 호소했다. 세상에 그런 가족이 어디 있냐는 말이었다.
“그래서 상담 때 어떻게 했어요?”
나는 원장님에게 빨리 다음 이야기를 해달라고 재촉했다.
원장님은 내담자와 상담 후, 바로 대기실에 있는 부모님을 불렀다. 내담자 옆에 부모님을 앉힌 후 말했다.
“어머님, 아버님. 있는 그대로 답변해주세요. 조금이라도 거짓말하시면 안 됩니다.”
원장님은 내담자의 부모님을 보고 이어 말했다.
“지윤이를 중학교 때부터 집안 살림시키신 거 맞아요?”
“네.”
내담자 어머니가 대답했다.
“명절과 제삿날, 온가족 다모였을 때 밥상 차리는 일도 지윤이가 다 했나요?”
“저도 같이….”
“네, 어머님도 하신 건 알고 있어요. 아버님, 아버님은 그때 뭐하셨나요?”
“저는 가족들과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원장님의 책망과 질책이 시작되었다.
“아버님, 생각해 보세요. 딸이 15살 때부터 집안 살림을 혼자서 했다고 하는데, 이게 말이 돼요?”
아버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버님, 회사 다니시죠?”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세요. 회사 동료나 직장 상사가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다 아버님께 넘겨요. 그것도 모자라 점심시간에 다 같이 밥 먹고 아버님 보고만 치우래. 아버님은 불평불만 없이 그 회사 다니겠어요? 회사면 때려치우기라도 하지. 이건 가족이잖아요. 거기다 딸이고. 그럼 당연히 아버님이 나서서 그러지 못하게 막았어야죠. 딸이 종노릇 하고 있는데 아버님은 마냥 좋다고 가족들이랑 하하 호호- 거리면서 있으셨어요? 딸이 이렇게 힘들어 하는 데도요?”
원장님의 말에 아버지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 부분에 대해 잘못됐다는 걸 일찌감치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지윤이한테 나타나는 증상이 왜 그런지 아세요? 독박 살림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와서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도 가정환경은 나아진 게 단 하나도 없고, 10년 동안 약만 먹이고 있었으니 환시, 환청까지 나타나죠. 지금도 애 좀만 괜찮아지면 살림하게 한다면서요. 아버님 딸 지킬 생각은 없으신 거예요?”
“오로지 살림살이 때문에 그런 겁니까?”
아버지가 묻자 원장님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냥 살림만 했다고 이러겠어요? 아주 친가들이 지윤이를 못 시켜 먹어 안달 나서 그렇죠!”
원장님의 말에 더는 입을 떼지 못하는 아버지였다. 딸에게 일어난 증상들이 친가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원장님은 이번엔 내담자 어머니를 보고 말했다.
“어머님, 어머님께서 밤늦게까지 일하시고, 살림살이까지 도맡아 하느라 힘든 건 제가 이해했어요. 그래도 딸은 보호하셨어야죠. 딸이 살림살이 하려고 태어난 게 아니잖아요.”
“…죄송합니다.”
“사과는 제가 아니라 딸에게 하세요. 그리고 딸이 백내장 때문에 왕따 당하고, 학창 시절 내내 친구가 없었다는 건 아세요?”
“네?”
어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르셨죠? 당연히 모르셨겠죠. 딸이 뭘 하는지, 학교에서 어떤 생활을 하는지, 힘들고 바쁘시더라도 관심을 가졌어야죠. 딸은 엄마가 불쌍하다고 10년도 넘게 살림살이 도와주다가 이런 상태가 됐는데, 어머니는 딸에게 무얼 해줬나요? 한번 말씀해 보시겠어요?”
어머니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신경이야 썼겠지만 딸이 이런 상태가 되었으니 무엇을 했다고 말하기에도 미안했다. 엄마로서 부족한 점이 많다는 걸 느꼈다.
원장님이 이렇게 딸이 보는 앞에서 부모를 질책한 것은, 단순히 부모의 시비를 가리기 위함이 아니다. 이 또한 환경치료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내담자가 가지고 있던 ‘억눌린 감정’을 상담사가 대신 시원하게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치료 효과를 거두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것을 친가에게 똑같이 해줘야 하는데,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남아있었다.
원장님은 부모님에게 다음 주에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오라고 말했다. 삼촌, 고모, 할머니, 한 명도 빠짐없이 상담소에 오라고 했다. 부모님은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노력해 보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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