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구는 집에서 소주를 병 채로 마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났다. 지 까짓게 뭐라고 나를 훈계하고 패고 정의의 사도라도 되는 양 행세한단 말인가. 학장 시절에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진 않은 새끼가!
쨍그랑!
박중구는 빈 소주병을 던진 뒤, 다시 소주를 까 벌컥벌컥 마셨다. 취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정신이 멀쩡할 때마다 어김없이 지숙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성문에게 성추행을 당한 후, 중구를 피하기 시작했다. 학교에 찾아가자 그녀가 말했다.
“오빠야, 이제 내 찾아오지 마라...”
“지숙아, 미안하다... 다 내 잘못이니 한 번만 용서해도..”
“아니다. 오빠야는 평생 그 사람한테 못 빠져나갈 거 같으니까, 그냥 그렇게 살아... 내가 괜히 참견했다.”
뒤돌아서는 지숙이었다. 중구는 그녀에게 미안했다. 처음으로 천치 같은 나를 좋아해 준 여자가 생겼는데,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 게 절망스러웠다.
그때부터였을까? 중구는 지숙을 집착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대학교에 간 지숙을 수소문해 찾아가기까지 했다. 지숙은 중구를 보고 놀란 토끼눈을 했다.
“중구 오빠야? 여기 어떻게 알고 왔나?”
“지숙아... 우리 다시 만나면 안 되겠나. 내 이제 성문이랑도 연락 안 한 지 오래됐고...”
“야, 박지숙~ 오늘 우리 집 빈다.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 가자.”
지숙을 안으며 말하는 남자였다. 그는 중구를 보고는 지숙을 쳐다봤다.
“응? 누구? 아는 사람이야?”
“아, 아니, 고등학생 때 알던 오빤데, 우연히 만나서.”
“아, 그러노? 반갑습니다. 정찬수라고 합니다.”
중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중구는 그 후에도 지숙을 잊은 적이 없었다. 공장에서 일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지숙이 다니는 대학교에 가 그녀를 몰래 훔쳐봤다. 그녀가 어디에 자취를 하는지 미행까지 했다. 남자 친구와 함께 들어가는 걸 수도 없이 봤다. 때론 지숙이 자신을 눈치챈 거 같기도 했다.
중구는 포기하지 않았다. 남자 친구가 있다면 헤어질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헤어지는커녕 싸우는 모습도 한번 본 적이 없었다. 중구는 절망스러웠다. 남자 친구와 함께 있는 지숙을 훔쳐본 후,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갈 때였다. 뒤에서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중구의 팔을 잡았다.
“오빠, 언제부터 나 미행하고 다닌기고?”
중구는 지숙을 보고는 놀라, 움찔거렸다.
“내, 저번에도 봤다. 오빠 우리 집까지 따라온 거. 대체 와 이러는 건데.”
“미, 미안하다. 이젠 안 그럴끼다.”
“참말이지. 약속하는 거야?”
“응...”
중구는 고개를 끄덕인 뒤 지숙과 헤어졌다. 그리고 바로 군대에 지원했다. 군 생활을 하면서 지숙에 대한 그리움은 절정에 달했다. 그녀의 집주소를 알고 있어 편지를 수차례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답장을 받은 적이 없었다. 답장을 받지 않았지만, 중구는 계속 편지를 보냈다.
그렇게 3년간 군생활을 한 뒤 중구는 12월 겨울에 전역을 했다. 그는 전역을 하자마자 지숙이 자취하던 집으로 갔다. 초인종을 누르고는 입술을 꽉 깨물고 지숙이 나타나기를 바랐다. 욕을 한 바가지 얻어먹어도 좋으니 얼굴이라도 한 번만 보고 싶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나타난 건 다른 여대생이었다. 그녀는 중구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편지를 보낸 사람이 당신이냐며 열 통이 넘는 편지를 그대로 주었다. 모두 읽지 않은 것들이었다.
중구는 그 편지를 보며 그리움에 사무쳤다. 그러던 중, 편지 몇 통이 모자라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지숙이 읽은 게 분명했다. 중구는 첫 편지에 만약 내가 전역했을 때, 사귀는 사람이 없다면, 나에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달라고 했다.
중구는 그때 왜 기대감이 생겼는지 몰랐다. 그것이 병적 증세로 시작된 하나의 망상이자 집착이라는 걸 그는 깨닫지 못했다. 중구는 그날 이후 다시 지숙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일주일 만에 그녀가 이 동네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중구는 그녀가 일하고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읍내에 새로 생긴 은행이었다. 중구가 문을 열고 들어가, 지숙을 찾았다. 머지 앉아 창구에 앉아 업무를 하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 있었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는 고객에게 미소 짓고 있었다.
중구는 감격스러웠다. 3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머리카락이 길어진 것 빼고는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듯했다. 오히려 말끔하게 차려입은 유니폼이 더 안달 나게 했다.
중구는 번호표를 뽑고는 자리에 앉아 지숙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만나면 뭐라고 해야 할지 벌써부터 떨려왔다. 지숙이 있는 창구에 자신이 뽑은 번호가 건너가자, 중구는 다시 번호표를 뽑았다. 이번에는 연달아 세 장이었다.
이윽고 지숙의 창구에 번호가 떴다. 자신이 뽑은 번호였다. 중구는 떨리는 마음으로 자리에 서 일어나 지숙 앞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저... 통장 하나 만들라꼬요.”
“네, 주민등록증 주시겠어요.”
“여기...”
그때까지만 해도 지숙은 중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스포츠머리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숙은 기계처럼 움직이며 입을 뗐다.
“성함이 박중구 씨....”
지숙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고 중구를 쳐다봤다.
“지숙아... 나... 며칠 전에 전역했다..,”
중구는 마른 입술로 말했다. 그녀와 시선을 맞추기가 두려웠다. 그러자 그녀의 격양된 음성이 들렸다.
“여기까지 따라온 기가?”
“.....”
“이젠 하다 하다 못해 내가 일하는 데까지 기어들어온 기가?”
“그게 아니라...”
“오빠, 진짜 미친 거 아이가? 나 결혼했다 아이가. 가정도 있데이. 근데 와 이라노, 진짜 정신 있나?”
중구는 망치로 가슴을 두드려 맞은 듯했다. 혐오를 넘어서 벌레 보는 듯 한 저 눈빛. 학창 시절에 성문이 보였던 눈빛이었다.
“시발!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러노!”
성문은 책상을 치며 벌떡 일어났다.
“씨발, 내가 너 좋아하면 안 되나! 그깟 거 한 번 추행당했다고 나를 배신하나? 그땐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안카나!”
“여기 경찰 좀 불러주이소!”
지숙의 외침이었다. 은행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보안요원이 와 중구의 팔을 꺾었다.
“이거 놔라! 내가 뭘 잘못했는데!”
결국 그날, 중구는 경찰에서 진술서를 쓴 뒤에서야 풀려나게 되었다. 형사는 그에게 사정은 알겠지만, 이건 엄연히 범죄라며 다음부턴 조심하라고 경고를 줬다.
하지만 박중구는 이미 조심할 생각이 없었다. 경찰서에서 나온 뒤 그는 다시 은행으로 갔다. 지숙이 일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이윽고 저녁 6시에 은행이 닫고, 7시 30분이 되어서야 지숙이 바깥으로 나왔다. 그녀는 동료들과 인사를 한 뒤 팔짱을 끼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겨울이라 초저녁인데도 저녁이 깊었다. 지숙이 은행 앞에서 서성이고 있자, 한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그녀를 놀래켰다. 대학교에서 봤던 그 남자였다.
“오빠야! 나 지금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그 새끼, 정신병자 또 왔다며?”
“그래! 얼마나 놀랬다구!”
“우리 지숙이 오줌 싼 건 아니지? 응?”
그러면서 지숙의 치맛자락을 들 추는 남자였다. 중구는 그 모습을 보며 치를 떨었다. 내 마음을 부정당하는 건, 은행에서 뿐만이 아니었다. 저들은 저렇게 평소에도 나를 가지고 놀았던 게 분명했다.
“가자, 빨리. 정신이상자 오기 전에.”
“아, 진짜 무서워.”
지숙이 남자 팔짱을 끼고 걷기 시작했다. 집으로 향하는 그들이었다.
중구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그들을 따라갔다. 그들의 집이 어딘지 알아볼 참이었다. 약 20분간 걸었을 까, 읍내에 신혼집을 차린 그들이었다. 그들은 신축 빌라 1층으로 들어갔다. 큰 평수는 아니지만 오밀조밀 신혼살림을 하기에는 알맞았다.
중구는 빌라 앞에 서서 고개를 돌려다 보았다. 곧 창문에 불이 켜지더니 저녁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계한 프라이를 하는 소리와 지글지글 된장국 냄새가 창문을 통해 퍼져 나왔다. 중구는 그 음식 냄새와 따뜻한 분위기를 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조금 전까지 만해도 분노로 가득 찼던 마음이 녹아내렸다.
그래, 그만하자.
지숙이 저렇게 행복해하는데, 뭘 더 하겠다고 여기에 있는 건가.
이제 끝났다. 나도 내 삶을 살아가자.
중구는 모든 걸 체념한 뒤 뒤돌아섰다. 그런데, 그때 그의 발목을 붙잡는 소리가 창문을 통해 새어 나왔다.
“지숙아, 이 편지 그 사람 거 아냐?”
“어? 어디서 찾은 거야?”
“책장 구석에 꽂혀 있더라.”
중구는 다시 뒤돌아 창문 가까이 걸어갔다.
“아, 이 새끼 딱 봐도 이거 범죄상이다.”
“뭐라고 썼는데?”
“네가 보고 싶다. 보고 싶어 미치겠다. 초소에 네 이름을 몇 번이나 새겼는지 모른다. 일기장에 네 이름이 가득하다. 꿈에서 네가 웃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행복했다. 지숙아 넌 행복하나?”
“오빠, 그만 읽어. 그냥 버려.”
“아니다, 찢어서 태워 뿌자.”
시시덕거리는 남자였다. 중구는 그 순간 마음에서 불꽃이 일어나는 걸 느꼈다. 차갑게 녹았던 감정들이 일순간 타올랐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1층으로 올라갔다. 현관문 앞에 있는 초인종을 두 번 눌렀다.
딩동. 딩동.
“누구십니까?”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옆집인데예. 혹시 장도리 좀 빌릴 수 있을라요?”
“장도리요?”
“누구야 오빠?”
“옆집서 장도리 빌려달라 카는데?”
“공구함 베란다에 있데이.”
남자는 바로 베란다로 가 공구함 박스에서 장도리를 꺼냈다.
철컥,
현관문 문을 열었다.
“개새끼야!”
박중구가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남자는 무방비 상태로 중구의 태클에 걸려 뒤로 넘어졌다. 장도리가 방바닥을 굴렀다. 박중구는 남자 위에 올라탄 채로 장도리를 덥석 잡았다.
“씨발 새끼야! 니가 뭘 안다고 씨부리노! 뭘!”
중구는 남자의 머리에 장도리를 내려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남자의 머리를 찍어댔다.
“오빠야!!!”
지숙이 소리쳤다. 남자는 정신을 잃었다. 얼굴에 피칠갑을 한 채 움직이지 못했다. 장도리에서 남자의 피가 뚝뚝 흘렀다.
“이러지 마요.. 왜... 왜...”
박중구가 장도리 질을 멈추고 지숙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성문이 했던 거 그대로 해줄 끼다. 그래야 니도 이 남자랑 헤어질 마음 생길 거 아냐. 안 그라나?”
지숙은 뒤로 물러나다 싱크대에 막혔다.
“벗어라.”
박중구가 말했다.
“벗고, 다리 벌려라.”
“오빠야, 오빠...”
“씨발년... 성문이처럼 억지로 해야 만족할 끼가?”
지숙은 중구의 위협에 벌벌 떨며 옷을 벗었다. 그것이 중구의 첫 살인이자 성폭행이었다. 그는 지숙을 강간한 뒤, 옆집에서 신고해 경찰에 붙잡혔다. 이후 실형 선고를 받고 옥살이를 했다. 하지만 중구는 석방을 한 후에도 범죄를 멈추지 않았다. 성추행과 성폭행을 일삼으며 나를 파괴시킴과 동시 사람들을 파괴시켰다.
브런치북 연재가 30화까지 밖에 안 됩니다.
31화는 아래 브런치북으로 봐주세요.
https://brunch.co.kr/@aronsong/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