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4 용지 한 장으로 하루 시작하기
#1
사원 1~2년차 때, 일을 잘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또한, 일을 왜 잘해야하는가에 대한 궁금증도 있었습니다.
일을 잘 한다는 것이 무엇이라 말하기 어렵다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잘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사람마다 맡은 역할과 업무가 다르고, 그 업무에 따라 갖춘 기술과 여러 상황이 다른데 그것을 어떻게 잘하고 못하느냐로 단순히 말을 할 수가 있느냐가 이해가 도통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일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100만큼 알 수 있다면, 80만큼 하든, 100만큼 하든 좀 더 노력해서 120을 하든 내 월급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객관적인 평가로 매길 수 없다면, 왜 굳이 120 아니 100만큼 해야하는 것일까? 80만큼 해도 되는거 아닐까?
그 궁금증은 금새 해결됐습니다. 80만큼 하다보니, 시간이 지나도 일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되었고, 이내 혼자서 해내야 하는 시점이 왔을때 패닉 상태가 왔습니다. 그동안 운이 좋아 좋은 동료와 선배들을 만나 80만큼만 해도 그럭저럭 티가 안나게 버틸 수 있었지만 그런 상태가 계속 지속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
#2
뒤늦게 일을 잘해야겠다고 깨달았을 땐, 혼자 일을 해내야 하는 상황이었고, 그것은 지금껏 내가 잘 하지 못했던 부분이었습니다.
밤늦게까지 일한다거나 주말에 일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일을 모르기에, 언제 얼만큼 끝날지에 대한 견적이 나오지 않는 두려움이 나의 일상을 집어삼켰습니다. 매일같이 일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하루하루 눈 뜨는 것이 일 때문에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때 <부르스 올마이티> 라는 영화의 대사가 떠올랐습니다.
누군가 인내를 달라고 기도하면
신은 그 사람에게 인내심을 줄까요,
아니면 인내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려 할까요?
용기를 달라고 하면 용기를 주실까요,
아니면 용기를 발휘할 기회를 주실까요?
내가 그토록 궁금했던, 일을 잘하는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인가?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어두운 시기에, 저 대사를 떠올리며 버텼습니다. 내가 일을 잘 하고 싶었고 그런 기회가 온 것이다.
#3
일이 가장 힘들게 느껴지는 것은 여러가지 케이스가 있겠습니다만, '언제 얼만큼 할 수 있을지, 어디서 부터 시작하면 되는지'에 대해 모를 때 가장 두렵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내일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말도 안되는 기대도 해봤지만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수 많은 날들이 고통 속에서 천천히 지나갔고, 그 고통이 저절로 없어질 수는 없었습니다. 모든 고통이 나를 통과해가고, 나는 그것을 피하든가(그만두든가), 계속 해나가야 했습니다.
일단은 가족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니, 일은 계속 했어야 했습니다. 일을 계속 하려면 그 힘듦을 헤쳐야 했습니다. 그 힘듦을 헤치려면 일을 잘 해야 했습니다. 일을 잘 하려면 많이 해보고, 많이 실패해봐야 했습니다.
#4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라는 답답함에, 선배는 이렇게 얘기해줬습니다.
얼마전에 (꽤 오래전이군요) TV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걸 봤어.
비정상회담이란 프로그램인데, 아버지가 힘들때 이렇게 말씀 주셨대.
네가 지금은 깜깜한 어둠속에 있어 아무것도 볼 수 없으니,
너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불부터 하나씩 켜 나가라
지금 너에게 필요한 말 같아.
아침에 출근하면 빈 종이 꺼내서 뭐 해야하는지 하나씩 다 적어봐.
그 적은 것을 좀더 세세하게 더 적어보고,
생각나는거 단 하나라도 다 적어.
그리고 그 하나만 해보고 또 다 적고 계속 그것만 해봐.
걱정만 하지 말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가 하나씩 해
밤새 흐르던 눈물을 닦고 출근해서 책상위에 A4 용지 한 장을 올려 두었습니다. 해야 하는 것, 내가 지금 힘든 것, 걱정 되는 부분, 확인해야 할 것, 잘 안되는 것, 물어봐야하는 것 모조리 적었습니다. 매일매일 그렇게 적었고, 매일매일 그것만 해내는 것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렇게 수 개월이 지나다보니, 엄청 잘 한 것은 아니지만, 망치지 않고 그럭저럭 해냈습니다. 포기하고 그만두게 될 줄 알았는데, 일단 해내게 되니 다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5
그로부터 10년이 지났습니다. 아직도 아침에 일을 시작하기 전에 빈 종이를 꺼내놓고 모든 것을 적어놓습니다. 그리고 오늘 해야할 것을 정하고, 그것에만 집중합니다. 더 할 수 있을 때는 더 하고, 그만해도 괜찮을 때는 그만합니다.
워라밸이라는 것이 사실 마음까지 편해야지, 해야할 일이 잔뜩 있는데 혹은 일이 잘 되고 있지 않은데 퇴근만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이 아님을 느꼈습니다.
일을 엄청나게 잘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것은 어떻게든 해내고 꽤 잘 해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몇년 전부터 들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도 몇 번의 또 다른 두려움과 위기가 올 수 있겠지만, 지난 날의 두려움의 경험들, 일을 잘 할 수 있게 다가온 기회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