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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다 Mar 26. 2022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강박

나도 사실은 편안하게 살고싶다.


#1

 복직을 한 뒤, 계속 마음이 편치 않다. 아무도 나에게 강요하거나 비난 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열심히 해내야 할 것만 같고 잘 해내야 하는 것 같은 강박관념이 떠나질 않는다. 이틀 걸러 하루 마음을 다잡아도 다시 또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이런 강박이 왜 생겼는지에 대해 요 며칠 생각을 해보았다


 시작은 가난과 불안이었다. 이 세계에서 내가 힘을 갖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어른이 되었을 때 엄마처럼 비참하게 살지 않으려면 내 힘을 길러야 하고, 살아남아야 하고, 잘 살고 싶다는 생각. 지금은 그때처럼 가난하지도 약하지도 않다. 엄청난 부자는 아니지만서도 그때를 생각해보면 정말 인생이 바뀐 것 같다. 그래도 가난에 대한 공포가 늘 있다. 언제든 그런 가난이 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공포감에 강박적으로 열심히 살아간다.


 "대단해"


 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하지만 난 이 말이 항상 불편했다.  대단하다고 하는 것들이 다 저런 강박속에서 치열하게 노력하고 버티고 버텨서 듣는 말인데, 나라고 이렇게 나를 옥죄어가며 열심히 살아가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저 그렇게 해야 살아갈 수 있었기에 습관이 되었고 지금도 그 두려움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한 것이지만 진정으로 원해서 선택한 것은 아니다.




#2

  알고싶지 않은 사실을 알아버렸다. 노력해도 나의 한계는 명확하다는 것.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능사는 아니라는 것.  출발선이 달라도 더 빨리 쉬지 않고 달리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체력에도 한계가 있어, 아무리 뛰어봤자 저만치 앞에서 걸어가는 사람 겨우 따라 잡을 수 있는 정도라는 것.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나의 아이들에게 나보다 조금 더 가까운 출발선을 줄 수 있다는 것.


 같은 대학을 나오고, 같은 회사를 다녀서 그들과 같다는 착각을 꽤 오랜시간 해왔다. 그들에겐 평범한 노력이 나날들이 나에겐 생존을 건 치열함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더 큰 가치를 가지거나 더 의미있게 사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아등바등 살았을 뿐이다.


 상담을 받을 때 마다, 상담사들이 내 어린 시절 가정사를 듣고 엄청 놀라는 듯 했다. 나보다 더 힘들고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왜 그렇게 놀라는지 그때는 몰랐다. 생각해보니 상담이라고 하는 것에 돈과 시간을 쓸 여유가 있으려면,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고, 그 경제적인 여유는 태어난 환경에서 나올 가능성이 크다. 어느 사이트에서 '가난한 사람을 위한 심리학은 없다' 라는 글을 보고 내 생각에 좀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먹고 사는 생존 자체에 포커스를 맞추고 살게되면, 마음은 미뤄두게 된다.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럴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3

"너랑 얘기하면 나도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보게 되네. 넌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을 많이 하고 노력도 많이 하잖아.  난 그냥 별 생각없이 살거든"


 며칠 전, 친구와의 연락 말미에 저런 말을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래, 난 열심히 살아가고 잘하고 있다라고 생각했을 텐데, 그 말이 무척이나 씁쓸했다. 


 나도 사실은 별 생각없이 살았으면 좋겠다. 내 자신을 사랑하고 싶고, 긍정적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 나라고 부정적이고 싶고, 한계를 긋고 싶고, 이렇게까지 노력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냥 오랜 시간 치여 살다보니,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4

대학생 때 몇 가지 기억이 나는 것이 있다. 


기억1)

 당시에는 수능을 보고나면 운전면허 시험을 따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유행하고 있었다. 나는 면허 학원 다닐 돈이 없을 뿐더러, 돈이 있다고 해도 지금 당장 차를 사서 타고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 돈은 절대 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돈을 내고 무언가를 배우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너무 큰 사치였다.



기억2)

 학교 친구들이 놀자고 할 때, 다섯번 중에 네 번 정도는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야했다. 학교 선배 중의 하나는 그것을 참 의아하게 생각했다.

"ㅇㅇ아, 그 시간에 차라리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장학금을 받는 게 더 돈버는거 아니냐?"

 나에게는 등록금을 감면은 내 손에 쥐어지지 않는 돈이기에 성적 장학금이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내일의 차비와 식비, 핸드폰 통신비가 당장 필요한 날들이었기 때문에.  난 나의 가치관대로 선택을 했다. 

나에게 필요한 돈을 벌고, 적당히 대학생활이라는 것도 해보고, 공부도 적당히 할 수 있는 만큼만했다. 



기억3)

 나의 집안 사정을 알게 된 다른 선배가 얘기했다.

"ㅇㅇ아, 고시반에 들어가지 그래?"

 나는 확실히 보장할 수 없는 결과를 담보로 내 시간을 투자할 수 없었다. 빨리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하는 것만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공무원을 준비한다거나 이런것들도 다 꿈같은 얘기였다. 하루 종일 공부하는 동안, 내 생활비는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여우와 포도 이야기의 여우처럼, 그건 매우 답답하고 싫다고 쳐다도보지 않았다. 나의 선택지에 아에 들어갈 수 조차 없었다.



기억4)

 친구들은 어학연수를 다녀오거나, 해외 여행을 많이들 갔다. 그게 무척 부러웠다. 유학을 가서 석사를 하고, 박사를 한 친구들도 참 멋있어 보였다. 꿈도 못꿀 일이었다.

 해외여행을 가서 부럽다는 말에 친구들은 종종 말했다.

"야 이거 나, 부모님이 그냥 보내주신거 아니야. 부모님께 빌려서 가는거야. 나중에 나도 다 갚아야 해."

 그 말이 참 우스웠다. 부모님에게 빌린 돈이라니. 빌려줄 수 있는 부모가 있어서 좋겠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냥 그렇구나 하고 웃어넘겼다.

 여행을 가려면, 생활비 외에 들어가는 돈을 더 모아야 하는데 내가 수완이 좋지 못한 것인지 벌이가 좋지는 않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차선의 선택으로 기업이나 단체에서 대학생들을 뽑아 해외로 보내주는 프로그램들에 지원해서 해외에 나갔다. 내 대학시절의 여행은 다 그런 것들이다. 

 


기억5)

 졸업할 때 즈음에 친구들과 한잔 하는데 맥주를 마시다보니 독일 이야기가 나왔다. 일곱 명 정도 앉아있었는데 다들 독일의 맥주와 음식이야기를 하면서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난 끼어들 틈이 없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동료들이 미국, 유럽을 매해 가는 것을 보고 눈물나게 부러웠고, 그래서 정말 운 적도 있다. 꽃보다 청춘 같이 해외로 여행가는 예능이 불편했다. 나도 눈부신 청춘을 즐기고 싶었고, 너무 부러웠기 때문에.



  






#5

 지금 나이 쯤이면, 예전의 가난은 추억거리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대학시절 과외를 하러 갈 때, 편의점에서 빵과 우유를 사서 과외하는 학생 집 아파트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먹곤 했다. 누가 지나갈까 나올까 흠칫 놀라고, 조심스럽게 먹었다. 무릎팍도사를 보며, 나도 눈물젖은 빵을 먹은 적이 있는 성공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겨우 평범해졌을 뿐이다(평범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3루에서 태어났으면서 마치 자기가 3루타를 친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간다." 


 이 말이 자꾸만 생각났다. 내가 꿈꾸던 삶을 살아가는 친구들은 못해도 1루, 2루. 좋으면 3루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의 노력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노력하고 노력해서 겨우 1루에 왔는데, 친구들이 3루에 간 것을 보고 내 자신이 부족하다 채찍질하고 더 노력해야한다는 강박, 내가 부족하다는 강박에 시달려왔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내 능력과 노력의 부족으로만 자신을 몰아세우며 미워하고,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자신을 학대하며 살아왔다.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출발선은 다르고, 나는 할 수 있는 만큼 했다. 내 노력으로도 안되는 것들이 더 많다. 그래도 노력했기에 이 정도 살아갈 수 있다. 나는 내가 꿈꾸던 삶을 못 살 가능성이 더 크다. 그 꿈이라는 것도 애시당초 내가 진정 원했던 것인지, 세뇌 된 것인지 모르겠다.


 나도 나를 사랑하고 싶다. 나를 사랑한다는 말이 사실 어떤 느낌인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나를 위해서 살아보고 싶다. 그건 어떤 느낌일까.  늘 가족을 위해 희생한다는 생각으로만 살아왔다.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가족의 행복과 일치하는 삶을 살고 싶다. 그럼 이렇게 강박적으로 노력하지도 않고, 그 노력으로 인해 가족에게 신경을 못쓴다는 죄책감도 내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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