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이미 바닷속에 있다
#1
사실은 몇날 며칠을 분노하고 울었다. 사소한 일도, 심각한 일도 있었지만 한꺼번에 다가오니 그 각각이 다른 것들이고 전혀 연관이 없다하더라도, '내 인생은 왜그러는거야 도대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권모술수니 봄날의 햇살이니. 며칠 전에 분노에 차올라 쓴 글, 사실은 그것도 그 상태에서 썼다.
#2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번 주 월요일 아침, 급하게 회사를 가다가 갑자기 든 촉에 유턴을 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주말 내내 둘째가 많이 아팠다. 장염이거나 코로나에 재감염된 것으로 생각이 되었다. 해열제를 먹어도 떨어지지 않는 열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첫째 때부터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었다.
어머니께, 아이를 맡기고 일찍 출근해서 오늘은 아이가 아파 일찍 퇴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운전해 가는 길이었다. 비가 후두둑 떨어지고, 아무것도 먹지 않아 힘이 없는 둘째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비가 오는데, 5분 거리라도 우산을 쓰고 할머니와 함께 걸어서 소아과에 갈 수 있는 힘이 있을까.
그 생각이 갑자기 떠올라 신호가 바뀌자 마자 유턴을 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도 비가 오는데, 걸어서 그 아이가 걸어서 갈 수 있을지, 할머니는 안을 힘도 없는데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며칠 전, 나의 상사와 사소한 트러블이 있었다. 그렇게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에 출근을 해야하는데 아이가 아파서 회사에 가지 못하겠다고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이 참 싫다는 생각이 1초 정도 들었지만. 체면 따위 버리고 가볍게 문자를 보낸뒤 유턴을 해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길 참으로 잘했다. 아이는 힘이 없어 현관앞에 앉아 있었다. 5분 거리 소아과에 차를 타고 안고, 문이 열리자마자, 진료를 받았다. 코로나는 아니라고 했다. 아이가 먹은 것이 없어 수액을 맞추면 어떻겠냐고 물었지만, 의사는 아이가 아픈 것이 걱정되는 수준이라며 소견서를 써줄테니 3차 병원으로 가보라 했다.
#3
곧바로 응급실로 향했다. 수액을 맞고, 피검사를 하고. 아이는 8살이지만 11월생이라 만 6세밖에 되지 않았다. 진료 기록표에 적인 나이를 보고 나니, 새삼스럽게 어린 아이로 느껴지고 슬펐다.
염증수치가 높아서 입원을 하라는 소견을 들었다. 단순 장염이라기에는 너무도 수치가 너무 심하게 높아서,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신없이 오전이 흘러갔다. 아이는 여기저기 바늘에 찔려 아파 울고, 나도 함께 만신창이가 되었다.
주저없이 사정을 말하고 휴가를 냈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첫째 아이가 한 번, 둘째 아이가 이번이 두번 째. 큰 병원에 입원을 한 것이 총 세번 째다. 함께 일을 하다보니, 아이가 셋인데 입원을 하게 되면 이런저런 조율과 신경쓸 것이 참으로 많다. 예전에는 아이가 아픔에도 불구하고 눈치를 많이 보며 휴가를 겨우 냈다.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려서 세상물정을 모르기도 했고, 남편 회사에서는 휴가를 내는 것이 어려웠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자칫하면 오해를 살 수 있는 타이밍이었지만, 당당하게 사정을 말하고 휴가를 요구하고 아이를 돌봤다. 어찌되었든 그렇게 하기 힘든 직업도 많을 텐데, 이렇게 휴가를 쓰고 아이를 돌볼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과 교대로 아이를 돌보며,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둘째 아이를 이렇게 단 둘이서 마주하며 자세히 들여다 본 적이 얼마나 있던가(나는 아이가 셋이다). 왜 힘든 일들은 이렇게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갑자기 한꺼번에 들이닥쳐 무거운 한 덩어리로 나를 살지 말라고 하는 듯이 작정하고 덤벼드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일까.
#5
남편과 교대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8년 전에 산악부 선배에게 들었던 '걱정 주머니'이야기가 생각났다. (TMI. 그 선배는 나름대로 덕업일치의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등반이 좋아서, 교직원을 하며 등반을 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문화인류학을 전공하며 네팔에서 연구를 하고 등반을 했다.)
나는 서른 살이 된 기념으로 네팔로 혼자 여행을 불현듯 떠났다. 그곳에서 그 선배를 만났는데, 그 선배가 네팔과 티벳 사람들의 삶을 연구하면서 얘기해 준 것 중의 하나가 '걱정 주머니'였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걱정 주머니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막상 앞둔 걱정이 해결되면 계속 잘 지낼 것만 같지만, 사실은 그 걱정이 해결되고 나면 자신이 지닌 걱정 주머니 크기만큼 또 다른 걱정이 그 주머니를 채운다는 말이었다.
살아보니 정말로 그러하다.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지금 당장의 걱정이 해결되면 그것은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 혹은 당연한게 되어버리고 잊고 살아가고 또 다른 걱정이 스멀스멀 그 크기만큼 채워지는 것을 느낀다.
첫째가 가와사키에 걸렸을 때, 이 아이가 살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더 이상의 행복도 행운도 바라지 않고 불행하게 살아도 되니 제발 아이가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기도했다(나는 무교이다). 그때도 이번의 유턴처럼 촉으로 아이가 응급실에 여러번 갔고 그로인해 치료를 좀 더 빨리 받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무사히 퇴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감사함을 잊은 채 또 무수히 많은 상처와 고뇌, 힘겨움을 분노하고 울고, 슬퍼하고 아파하며 지냈다.
그것들의 반복이었다. 그 당시의 걱정주머니가 해결되면, 조금만 지나 또 다시 그 주머니의 크기만큼 걱정 주머니가 채워지고, 그것으로 인해 고통받거나 아프거나 슬프거나, 분노하거나 상처받거나.
#6
회사 일은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약에 애매한 인정을 받았다면, 난 더 잘하기 위해 노력했을 테고, 아이가 아픈것도 좀 더 깊게 들여다보지 못했을런지도 모른다. 아이가 아파서 길게 휴가를 내겠다는 말이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회사는 늘 남의 일이라고 말들 하지만, 나는 항상 내 온 마음과 힘을 다해서 잘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때로는 가족조차 잊을 정도로 매진하고 몰입하고 내 자신과 함께 성장하는 것도 마다 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둘째의 입원으로 함께 생활을 하며, 인생의 목표와 나의 발전에 대해 다시 생각해봤다. 내 인생의 중요한 가족, 내 자신, 그리고 회사에 쏟는 에너지에 대해. 내가 하고 싶고, 살아가고 싶은 방향에 대해.
그렇게 생각을 한참동안 하다보니, 오늘 본 <소울>이라는 영화의 대사가 와닿았다.
어린 물고기가 나이 든 물고기에게 물었어요.
"저는 바다를 가고 싶어요!"
그러자 나이든 물고기가 말했어요.
"바로 니가 있는 이곳이 바다란다"
동생이 세상을 떠난 뒤, 오랫동안 무채색의 삶을 살아가다가 모처럼의 꿈과 목표가 생기고 매진해왔다. 그런데 그것이 어그러졌다. 때마침 오는 자잘한 힘든 것들이 쌓여 '내 인생은 역시'라는 생각과 함께 도서관에 처박혀 책을 읽으며 몇 시간 동안 숨죽여 울었다.
#7
그것이 뭐 그렇게 중요한가. 인정을 받고, 좋은 평가를 받고, 나의 영혼이 다하지 않은 매 순간 똑같이 흘러가는 하루 속에서 남이 좋아보이는 목표를 내가 달성하든 그것이 뭣이 그렇게 중요한가. 이미 진심을 다했는데, 그게 당신들에게 만족스럽지 않다면 더이상 뭐 어쩌라고.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이것 또한 다행이다. 내가 분노할 일과 마주한 것이. 애매하게 좋은 것을 받았으면 진짜 내 삶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또 앞만 보며 달려갔겠지. 그것이 목표라는 것으로 생각하고, 이미 바다에 있는 것을 모른채, 최고의 기회라 생각하며 목표만 바라보며 다른 것을 보지 못했겠지.
아이가 병원에서 아빠와 산책을 하다가 초승달에서 반달이 되어가는 즈음의 달 사진을 찍어보내왔다. 달이 차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