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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다 Dec 17. 2022

이제는 슬픔을 멈추고, 나의 삶을 살아가야 할 때

나는 나고, 나의 삶을 살아야 한다

Photo by Andrew Neel on Unsplash



#1

 아이의 모래놀이 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아이의 상담에는 엄마의 상담이 포함되어 있어서 아이 상담을 해주는 선생님과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다. 그 선생님과는 이런저런 지역에서 진행된 미술 심리 치료도 함께 해왔어서, 제법 친숙하고 가깝고 나에 대해 꽤 많이 아는 분이 되셨다. 어쩌다보니 나의 아이들도 상담하고 나의 가족에 대해 아는 가까운 친척 어른처럼 따뜻하게 말해주는 좋은 분이다.


 최근에, 그 선생님이 진행하신 지역 집단 미술 심리 치료를 마친 후기로 식사 모임이 있었다. 나는 잠시 들러 인사만 하고 식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선생님이 식사 때 즐거웠는데, 오지 않아서 아쉬웠다며 물었다.


"맛있었는데, 많이 바빴어요?"

"아니오, 제가 사람이 많은 곳에서 함께 식사를 하지 못해요."


"왜요? 언제부터 그랬어요?"

"동생이 죽고 나서 부터요."


"그럼 꽤 오래되었네요. 어떤 점이 힘들어서 그런가요?"

"그냥 동생이 정신과에서 상담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는데, 사람들과 모여서 억지로 웃고 장단을 맞추며 식사를 하는 것이 에너지가 부족해서 너무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그렇게 느껴요. 사람들이 많으면 의미 없는 일상의 얘기를 하면서 그 장단에 맞추고 웃는것이 힘들어요."


"동생의 상담 내용을 봤어요? 요즘에도 보고있나요?"

"네"


"그거 이제 끊어내야해요. 동생이 죽기 직전에 가장 힘든 마음을 농축해서 담은 그 내용들을 보면서 자신과 동일시 하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을 갉아먹는 행위예요. 동생과 온다님은 다른 사람이에요. 같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다르게 받아들였고, 다르게 발산하며 살아왔어요. 그것을 그렇게 자기인 것처럼 받아들여서는 안돼요. 그렇게 해서는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온다님의 상태가 좋아질 수 없어요"

"저는 이미 포기했어요. 지금까지 많은 것을 이뤄왔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엔 이렇게 비극이 더해졌고, 그래서 더이상 기대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열심히 더 한다해도 나아지는 것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것은 이제 그만 둬야 해요. 지금까지 너무 많은 것을 혼자서 감당하며 잘 해왔어요. 온다님만의 에너지가 있어요. 그런 에너지는 아무나 가질 수 없는거예요. 그렇게 힘들게 자신의 삶을 잘 일구어 왔는데, 자신에게 과거의 프레임을 자꾸만 씌우고, 동생과 동일시 하면 당연히 미래가 어둡게 느껴질 수 밖에 없어요. 이제는 멈춰야 해요. 자신에게 있는 힘을 믿고, 좋은 날이 올 것을 믿어야해요. 꽃이 피는 시기가 다르듯이 이제는 좋은 일만 있을테니까. 지금까지 버텨온 자신을 칭찬하고, 잘 돌보고, 과거의 프레임은 버리고 새로운 나의 가족, 나의 모습으로 잘 살아갈 수 있어요. 원 가족들을 부양하고, 혼자 힘으로 학교도 다녔고, 회사도 들어가고, 아이들도 잘 키웠잖아요? 그리고 어머니도 잘 모셨고요. 이보다 어떻게 더 잘 할 수 있어요. 이제는 멈춰야 해요. 내가 해온 것들을 자꾸만 비하하고, 인정하지 않고, 원가족의 불행과 동일시 하지 말아요"


 



#2

 항상 생각해왔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와서 아이 엄마가 되었다. 이건 그냥 평범한 일. 대단한 것은 창업을 해서 성공하거나,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받거나. 세계 여행을 한다거나  뭐 그런 것들이라 생각했다.


 나는 악다물고 죽을 힘을 다해 지금의 내 주변의 '평범'하다는 삶을 겨우 이뤘다. 몇년 전, 너는 어떻게 이렇게 살게 되었냐는 말에 친구는

"그냥 엄마가 공부하라는대로 해서 하다보니 여기까지 온거지 뭐"

라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렇구나. 나에겐 죽을만큼 힘들게 이뤄낸 것이 누군가에겐 그냥 태어나서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해서 어쩌다보니 평범한 것.

 

 오히려, 십대에는 이런 사회의 불평등함에 대해 일찍이 받아들였다. 내가 불평해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이 삶을 탈출할 수 있는 것이라 믿었고, 그것이 나에겐 공부였다. 그리고 실제로 어느 정도 그 삶에서는 탈출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어릴 때 기대했던 나의 모습에 닿을 수 없는 한계가 더욱더 느껴지고, 동생의 죽음이 더해지며 희망을 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 되었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상처가 되는 것 같아 거부하게 되었다. 늘상 생각날 때마다 희망차게 적던 버킷리스트를 더이상 적지 않는다. 될거라 믿고 노력한 뒤의 결과에 더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3

 어제는 갑자기 죽는 꿈을 꿨다. 


 동생이 죽은 이후로 반복되는 삶, 더 이상의 기대가 없는 삶에 그냥 빨리 시간이 흘러서 아이들이 크고 성인이 되고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의 삶은 더이상 이보다 더 크게 나아질 수 없고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어렵다 생각되었다. 노력은 하지만, 기대하지 않았다. 다음 생이란 것도 없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 꿈이 참 리얼했다.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잘못해서 붕 위로 떠서 사고가 크게 나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꿈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생각했다.


'아, 아직 안되는데'


 아이들에게, 남편에게 이렇게 아무런 준비없이 갈 수 없는데 라고 생각했다. 꿈에서 깨고 나서 깨달았다. 나는 사실 죽고 싶은 것이 아니구나. 죽고 싶다, 죽고 싶다 말을 내뱉지만 실제로는 살고 싶구나. 가족과 함께 잘 살고 싶은 것이 내 진짜 마음이구나.


 그동안 동생의 자취를 남기고, 계속해서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했다. 죽기 직전의 농축된 감정이라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고, 그저 아파하고,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고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며칠 전 상담 선생님의 말대로 이제는 그만 멈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삼년상이 생각나서(삼년상은 부모를 위한 것이지만) 찾아보니, 실제 만 3년이 아니라 27개월이 지날 때까지 고인이 살아있는 것처럼 효를 다하는 것이라 한다. 인간이 태어나서 3년이 되어야만 부모의 품을 떠날 수 있다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꼭 부모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의 죽음에는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고. 그 시간이 이제 지나가고 있는 것 같다.


 아빠와 동생의 죽음을 일찍 겪게 된 것에 너무도 슬프다. 앞으로도 때때로 굉장히 슬플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멈추고 나의 삶을 다시 살아야겠다. 나는 나고, 나의 삶을 살아가야 하니까.


 



p.s.

생존자의 글은 여기까지.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자살유가족에게 도움이 되고자 글을 계속 써왔으나, 이제는 멈추려 합니다. 나중에 심신이 안정되고 좀더 전문적으로 죽음에 대해 공부를 한 뒤, 실제로 도움이 되는 글을 쓰겠습니다. 너무도 어두운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진짜 제 삶을 잘 살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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