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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쁜파크 Aug 01. 2024

밝은 세계에 있는 사춘기 전의 딸

4학년 딸은 일주일에 한 번 주제글쓰기를 한다. 담임 선생님이 학기 초에 글쓰기 주제 40가지를 프린트해서 나눠 주셨고 아이가 매주 한 가지를 선택해 주말에 글을 쓴다. 여름 방학식 날, 생활통지표가 나오느라 벌어진 책가방 사이로 글쓰기 공책이 눈에 띄었다.


아이는 어떤 주제를 골랐을까? '세상이 온통 흑백으로 보인다면', '부자가 되면 하고 싶은 것', '좋은 친구란 어떤 친구일까' 등 아이가 고른 글감이  흥미로웠고 아이의 순수하면서도 웃기고, 기발한 생각이 글에서 느껴졌다.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고마운 것"이란 주제가 있었다. 

아이의 답은 '가족'이다.  


아이의 동의를 구하고 올린 글


사춘기가 시작되기 전의 딸. 친구들과 노는 게 물론 좋지만 아직까진 가족에게 마음이 더 기울고 있다. 엄마가 한 달에 두 번 몸을  씻겨주길 바라고, 엄마가 자기 방 침대에서 같이 자는 것을 반긴다. 핸드폰 평균 사용시간이 하루 5분을 못 채울 정도로 아직 큰 비밀도 없다.  


소설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는 불량 선배 크로머와 엮이면서 가족에게 털어놓지 못한 비밀이 생긴다. 거칠고 힘센 크로머에게 잘 보이려고 싱클레어는 과수원에서 사과 한 자루를 가득 훔쳤다는 이야기를 꾸며낸다. 크로머는 싱클레어의 거짓말을 빌미로 지속적으로 돈을 요구한다. 열 살의 싱클레어는 어머니 방에 있는 그의 저금통을 몰래 훔치는 등 자신을 떠받치던 어린 시절로부터 처음으로 멀어진다. 


크로머를 만나기 전까지 싱클레어는 부모님만이 있는 밝은 세계에 머물렀다. 그곳은 사랑과 존경, 크리스마스 축하, 성경 말씀이 있는 아름답고 질서 있는 세계였다. 부모의 세계에서 벗어나 크로머와의 일을 비밀로 간직한 싱클레어는 싸움, 무서움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 세계도 멋지다. 집이라는 밝은 세계, 집을 제외한 어두운 세계는 나란히 붙어 있다. 


내가 가진 고마움이 '가족'이라는 딸의 글을 보면서 여전히 밝은 세계에 머물고 있는 아이가 느껴졌다. 하지만 가까운 미래에 아이의 밝은 세계는 균열이 생기면서 친구들과 비밀이 늘고, 자기 방에 엄마가 들어오는 것을 반기지 않으며, 핸드폰 사용시간이 현재와 비교도 안될 정도로 늘어나겠지.


내 속에서 어린이 세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부모가 이런 문제에서 정말로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으나 나의 부모님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p.60, <데미안>


사춘기 심리를 묘사한 헤르만헤세의 문장을 남긴다. 


아이의 글이 <데미안>의 첫 번째 챕터인 '두 세계'를 떠올리게 한 이유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밝은 세계에 머물러 있다는 안도감이 아니다. 두 번째 세계로 떠나기 전 아이가 머물렀던 부모의 세계가 따뜻했다니 육아를 하는 내게 힘이 되었다. 아이가 처음 속한 세계가 빈집이 아니었음이 감사하다.




가을 나무 주변으로 그렇게 잎사귀가 떨어진다. 나무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비가 나무에 내리고, 햇빛이나 서리도 내리지만, 나무는 천천히 가장 내밀하고 가장 깊은 속으로 점점 더 움츠러든다. 

나무는 죽지 않는다. 기다린다.

p.88, <데미안>


네가 사춘기가 되어 가장 깊은 곳으로 점점 더 움츠러들 때, 성장하기 위해 너 스스로 기다리고 있는 시기임을 엄마가 되뇌일게. 


그전까진 나도 아이와 추억을 더 쌓아두고 싶다. 천둥이 몰아치는 무서운 밤에 안정을 줄 수 있는 보이지 않는 끈이 단단해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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