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개월 : 아기의 리즈시절임이 분명하다
회사에서의 부진한 퍼포먼스에 괴로워하다 도피처로 준비했던 국비 유학에 얼마 전 최종 선정되었다. 회사에서는 매일 꾸지람과 모욕을 들으며 혼나는 나날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행운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얼마나 간사한지, 유학이 간절했던 그 시절의 마음은 그새 어디로 사라지고 또다시 내가 아직 가지지 못한 것만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아직 회사에서 제대로 자리 잡지도 못했는데 유학을 다녀오면 또다시 뒤처지는 것은 아닐까 두렵고, 남편의 커리어에 지장을 두는 것은 아닐까 괜스레 미안하기도 하고, 아직 어린 아기의 언어습득에 혼란을 주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된다. 동시에 이왕 가는 유학에서 최선의 자기 발전을 이루어내려면 이것저것 알아보고 준비해야 할 사항도 많아서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렇게 또다시 내가 좇아가야 할 정상만 바라보며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 내게 문득 아기가 얼굴을 들이밀었는데, 그 얼굴이 눈부시게 예뻐서 한없이 행복해졌다. 모든 것을 잃어도 이 아기가 내 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을 만큼 요새 27개월의 아기는 너무나 사랑스럽다. 동글동글한 이목구비는 날로 또렷해지고 있고, 또박또박 표현해 주는 아기의 생각은 날로 놀랍고 깜찍하다.
나보다 잘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 괴로운 나날이었는데,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야 마땅한 삶이다. 찬찬히 돌아보면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여전히 나의 직장은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곳이고, 어느새 번듯한 집과 차도 마련했다. 언제나 집으로 돌아가면 사랑스러운 남편과 아기가 기다리고 있고, 헌신적인 친정엄마 덕분에 육아에 대한 죄책감 없이 출근을 할 수 있다. 친정과 시댁을 통틀어 아픈 사람 하나 없고, 언제나 만나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좋은 관계가 주변에 가득하다. 내년부터는 2년간 국비를 지원받아서 영국에서 유학할 기회도 주어졌다. 생각해 보면 너무 과분하게 행복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직관적으로 행복한 순간은 누구보다 건강하고 똘똘한 아기를 내 품에 꼭 안는 그 순간이다. 아기가 건강하게 무사히 태어나기만을 바랐던 시기가 있었고, 어느새 그 꿈이 이루어지고 나니 아기가 또래보다 키가 크고 말이 일찍 트이기를 바라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제법 말이 빠른 아기에게 유창한 영어실력을 갖추어주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구른다.
학창 시절부터 나는 쉽게 만족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항상 스스로를 채찍질해 왔다. 그 덕분에 꽤나 그럴듯한 명함은 얻었지만 그에 대한 부작용으로 행복을 느끼는 데에는 다소 서툴다. 내 성격이 나를 괴롭게 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자칫 아기에게도 세찬 채찍을 휘두르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나를 위해서도, 내 말과 생각을 흡수하며 자라나게 될 아기를 위해서도 조금 더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연습할 필요가 있다.
아가야, 엄마는 삼십이 넘도록 여전히 익혀가는 중이지만 넌 조금 더 일찍 체득해서 엄마보다 한층 더 행복한 청춘을 즐기렴. 가진 것에 감사하고, 가지지 못한 것에 너무 괴로워하지 않도록. 엄마랑 같이 노력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