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개월: 혼자서 잘 해내는 아기, 혼자서 해내는 모든 게 엉망인 엄마
요즘 내게는 아기 엄마로서의 자아보다는 사회인으로서의 자아가 더 버겁다. 그 탓에 육아일기를 핑계로 마련한 이 공간에서 마저도 어느새 아기 얘기가 아닌 내 얘기만 주야장천 늘어놓게 되는데, 조금 민망스럽긴 해도 엄마의 기분도 육아의 큰 부분 중 하나니 뭐 적당히 엮는 수밖에 없겠다.
물심양면 육아를 도와주시는 양가 부모님들과 혼자서도 잘 자라고 있는 아가 덕분에 요즘의 육아는 꽤나 수월하다. 28개월의 아가는 아기 취급받는 걸 몹시나 싫어한다. 가끔씩 이를 닦거나 옷을 갈아입을 때 엄마를 찾으며 칭얼대다가도, 언니나 누나들은 혼자서 하는 거라고, 그게 멋진 거라고 한 두 마디 던져주면 이를 악 물고 혼자 해낸다. 혼자 해내는 모습에 멋지다고 두 엄지를 치켜들어주었더니, 이제는 본인이 할 일을 마치면 나보다도 먼저 엄지를 치켜들며 나의 칭찬을 재촉하는데 그 모습이 아주 깜찍하다. 아직 한참은 더 아기처럼 어리광을 부려도 될 나이인데도 혼자서 해내고 싶어 하고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는 그 모습이 너무 기특하다.
요즘의 28개월의 아기를 움직이는 힘은 자아효능감이다. 혼자 해낼 수 있고, 혼자 판단해서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아기를 그 어떤 것보다 신나게 만들어준다. 그 반대급부인 것인지 요새 아기는 우리가 하는 말에 무조건 "아니!"라고 외치고 안 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서 만들어내기 바쁘기도 하다. 엄마아빠가 결정한 것을 무조건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자신이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아기에게는 매우 중요한 부분인 것 같다.
그와 반대로 엄마인 나는 요새 자아효능감을 느낄 일이 없어 괴롭다. 28개월의 아가에게도 34살의 엄마에게도 자아효능감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감정이구나 싶다. 회사에서 나의 연차는 지금 매우 애매해서 어떤 동기들은 벌써 제법 괜찮은 의사결정을 내리면서 리더 느낌을 풍기기도 한다. 내가 가진 연차는 내가 가진 경력과는 무관하게 어느새 무심하게 제법 많이 쌓여버려서 나를 옭아매는 부담감이 되어 버렸다. 잘 해내야 하고 잘하고 싶다는 의지와는 무관하게 오히려 그 부담감이 더 많은 실수를 만들어내면서 매일매일이 실수와 후회와 책망으로 점철된다.
주변에서 내게 기대하는 모습은 사실 별게 없을 텐데도 스스로에게 더 멋진 모습을 기대하고 있는 탓도 분명 있을 것이다. 언제나 주변의 기대보다 잘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으니까. 남들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지는 않으면서, 더 큰 결과물을 기대하는 놀부 심보가 이제 본색을 드러내 내 자존감을 마구 갉아먹고 있다. 매일 잘 해내는 주변인들을 보면 내 한심한 모습이 대비되어서 마냥 진심 어린 축하를 보내기도 어려운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아기의 성장은 눈부시게 기특하고 고맙다. 엄마가 스스로의 우울증에 사로잡혀서 괴로운 시절에도 미안한 마음이 자라날 틈이 없게 혼자 너무 잘 자라주고 있어서 그저 고맙다. 조금의 아쉬움도 남지 않을 정도로 아기는 깜찍하고 이쁘게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고, 매일 사랑스러운 말을 전해준다. 이렇게 예쁘게 말하는 방법은 어디서 배웠나 싶을 정도로 예쁜 생각과 말이 자라나는 모습이 그저 기특하다.
엄마가 힘들다고 하면 같이 눈물을 글썽이며 '파이팅!'이라고 외쳐주고, 내가 기분이 좋아진 것 같으면 '엄마 여울이 덕분에 기분 좋아졌어?'라고 눈을 맞추며 웃어주는 사랑스러운 아기. 요새는 엄마를 불러줄 때 꼭 앞에 "사랑하는 우리 엄마"라는 수식어를 붙여 주는데 그럴 때마다 매 순간 행복의 극치를 맛보고는 한다.
내 아기가 이렇게 예쁘게 자라고 있다는 사실 덕분에 오늘도 마이너스를 찍은 내 자존감은 겨우 제로 수준까지 차오른다. 그래, 적어도 이렇게 내 아기가 예쁜 말과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 내가 영 엉망으로 살고 있지는 않다는 증거일 것이다. 지금 내 마음에 가려진 먹구름을 걷어내면 그 뒤엔 긍정적이고 사랑받아 마땅한 내 자아가 파랗게 빛나고 있을 거라는 용기를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