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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페지오 Jul 12. 2022

친구가 담가 준 매실 장아찌

최근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녀는 나와 대학교, 대학원을 같이 다닌 친구이고 학교 동문회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일 년에 한두 번씩 만나곤 했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최근 2~3년 동안에는 전혀 만나지 못하였다.


친한 선배로부터 내가 은퇴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후 내 얼굴이 자꾸 어른거렸다고 했다. 만난 지 너무 오래되었으니 한번 보자고 하면서 자신의 집으로 초대를 했다. 미국 생활을 오래 한 친구는 평소에도 집에서 모임을 자주 한다고 하는데 친구  집으로 가는 것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최근에 왕래도 없었고 오랜만에 만나는데 덜컥 집으로 간다는 게 좀 망설여졌다. 망설임의 가장 큰 이유는 갱년기 때문이었다.




은퇴 후 평화로운 일상을 즐기고 있었는데 덜컥 갱년기가 찾아왔다. 갑자기 얼굴에서 땀이 흘러내리고 더웠다 추웠다 했다. 호르몬 변화로 인해 체온 조절이 잘 안 되는 갱년기 증상이라고 하던데 날씨가 더워지니 더 심해져서 외출도 하지 않고 사람도 만나지 않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얼굴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리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이 힘든 갱년기를 견뎌냈는지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항상 맏이었던지라 나보다 먼저 갱년기를 겪은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엄마한테 여쭤봤더니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갱년기 같은 것은 모르고 지나갔다고 하셨다.  이 나는 사치스럽게 갱년기 따위로 힘들어하고 있다는 질책처럼 들려서 더 아팠다. 앞으로 어떤 증상이 또 나타날 지도 알 수 없고 언제쯤 끝나는지도 알 수 없으니 답답하고 힘들었다. 이렇게 힘겹게 갱년기를 버텨내고 있던 중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런 상태로 친구를 만나도 될지 걱정이 되었지만 반가운 마음에 덜컥 초대를 응해버렸다. 그런데 약속 날짜가 다가올수록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친구 집에 가서도 이렇게 땀이 나면 어쩌지, 집에 올 때 지하철에서 땀이 나면 어쩌지... 온갖 걱정이 나를 괴롭혔다.

너무 걱정을 한 탓인지 친구 집에 가기로 한 날엔 두통과 소화 불량까지 찾아왔다. 약속을 좀 미룰까 생각했지만 나를 위해 손수 음식까지 준비한 친구를 생각하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만가지 걱정과 힘든 몸을 이끌고 친구 집에 도착했는데 그녀의 집은 참 아늑했다. 미국에서 사용하던 가구를 그대로 가져온 탓인지 미국에 놀러 간  같았다. 마치 어제 만났던 것처럼 반겨주는 친구 모습을 보니 걱정이 한순간에 사라졌고 친구가 만들어 준 파스타와 샐러드를 먹으면서 3년 동안 쌓였던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즐겁게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얼굴에서 땀이 흘려서 갱년기 증상을 고백했다. 친구는 아직 갱년기 증상이 없다고 하면서 나를 걱정해 주었다. 음식이 너무 맛있는데 소화가 안 돼서 많이 먹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매실 장아찌를 꺼내 주었다. 직접 담근 것인데 소화 안 될 때 먹으면 좋다며 살뜰하게 챙겨서 담아 주었다.

친구가 정성스럽게 차려 준 음식들

친구가 준 매실 장아찌를 들고 집에 가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오랜만에 만나도 6년을 함께 한 우정은 그대로였다. 갱년기는 나만 겪는 게 아니고 다들 겪게 될 일인데 친구 집에 가기까지 무엇을 그리 망설이고 무엇을 그리 걱정했나 싶었다.

그녀는 박사과정을 하느라 미국에 오래 다가 한국에 들어와서 대학교 친구들밖에 없다고 했다. 이제 애들도 컸고 여유도 있으니 자주 만나자고 했다. 오랜만에 외출을 해서 친구에게서 받아 온 에너지가 갱년기 때문에 축 쳐져있던 나를 일어서게 했다.


갱년기 따위에 굴복하지 말고 친구들도 만나고, 하고 싶었던 일도 해봐야겠다. 은퇴해서 같이 일상을 나눌 친구가 있다는 것은 축복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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