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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페지오 Jun 29. 2023

할머니와 손자의 해외여행

아들이 할머니와 일본 여행을 갔다.

아들은 요즘 휴학을 하고 취업 준비를 하고 있다. 개발자로 취업을 하고 싶다며 6개월짜리 프로그래밍 과정을 수강하고 있는데 학원이 1주일간 방학이라 바람도 쐴 겸 일본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군대 제대를 하고 한 번도 여행을 못 갔고 수업이 힘든지 지쳐있었던 것 같아서 흔쾌히 승낙하였다.


친구들과 같이 가거나 혼자 갈거라 생각하고 잊고 있었는데 저녁을 먹으면서 일본 여행을 할머니와 같이 가고 싶다고 말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제안이라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애꿎은 식탁만 열심히 닦았다.


아들이 할머니와 단둘이 여행을 가겠다고 할 때 "왜"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여든이 가까워오는 할머니와 해외여행을 가겠다니, 게다가 가족 여행도 아니고 단둘이 여행을 다녀오겠다니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4년 전에 엄마를 모시고 미국을 다녀온 적이 있다. 딸은 일 년에 두세 번씩 미국 출장을 다니고 엄마 친구분들도 부부동반 여행을 자주 가시던데 엄마는 미국에 못 가보신 것이 마음에 걸려서 엄마를 모시고 미국을 한번 다녀오고 싶었다.


그러나 엄마와의 여행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고관절 수술도 하셨고 연세가 있으신 엄마는 걷는 것을 힘들어하셨다. 몸이 힘드니 어렵게 예약한 모든 일정에 불평불만만 늘어놓으셨고 돈이 아깝다며 이미 지불한 호텔에서의 아침 식사도 안 하시겠다고 하시니 하루도 쉽게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7박 8일 동안 매일 티격태격하며 여행을 간신히 마치고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져서 돌아왔다.


여행을 다녀와서 내 생각보다 우리 엄마가 많이 늙으셨다는 것을 깨달았고 엄마를 모시고 가는 여행은 단단히 각오를 하고 가야겠다고 다짐. 이제 우리 엄마도 미국 여행을 다녀온 친구들한테 주눅 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기분은 좋았다. 밀린 숙제를 한 기분이었다.


그 후 더 늦기 전에 한번 더 여행을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미국 여행의 여파가 너무 커서 선뜻 추진하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스물다섯 살짜리 손자가 할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하는 것이다.


가까운 일본이고 3박 4일 일정이라 크게 부담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엄마께 말씀드렸더니 손사례를 치시면서도 좋아하시는 눈치였다. 말이 나온 김에 얼른 비행기 표와 호텔을 예약해 드렸다. 겉으로는 싫다고 하셨지만 손자와 가는 여행에 들떠있는 엄마 모습이 소녀 같아 보였다.


그런데 여행 날짜가 가까워올수록 걱정이 돼서 잠이 오지 않았다. 눈치 없는 손자가 할머니에게 좋은 것을 많이 보여드리고 싶다는 마음에 할머니를 너무 힘들게 하지는 않을지, 손자에게 폐를 끼치기 싫은 할머니는 다리가 아프다는 말도 못 하고 무리를 하는 것이 아닐지... 온갖 걱정이 내 머릿속에 맴돌아서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드디어 출발 날짜가 되어 엄마와 아들을 인천 공항에 내려드리고 왔다. 오랜만에 가 본 인천공항은 여전히 활기차고 아름다웠다. 공항 가는 길이 너무 설레서 나도 같이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드니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이번 여행은 아들이 군대를 제대하고 5년 만에 처음으로 가는 해외여행이다. 엄마에게도 같이 가자고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할머니 하고만 여행을 가겠다고 한 것이 조금은 서운했다.

 

떠난 지 몇 시간 후에 엄마한테 문자가 왔다. 호텔에 잘 도착해서 맛있는 냉우동을 먹고 방에서 쉬고 있다고 하셨다. 아들은 내일 관광 코스를 미리 둘러보러 나갔고 엄마오늘은 호텔에서 쉬시고 내일부터 같이 다니기로 했다고 한다. 아들이 할머니를 배려해서 여행을 잘하고 있는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호텔 방에서 쉬시는 엄마는 일본에서 찍은 사진을 여러 장 보내셨는데 톡에서도 들뜬 마음이 느껴져서 아들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진작 엄마를 모시고 여행을 한번 다녀왔어야 했는데 내가 못한 효도를 아들이 대신해 주어서 고마웠다.


본인이 가고 싶은 곳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을 텐데 할머니를 모시고 가겠다고 한 예쁜 마음이 고맙다. 말수가 적은 아들이라 자세히 말하진 않았지만 하루라도 더 건강하실 때 할머니께 좋은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던 것이라면 너무 고마운 일이다.


혼자 갔더라면 본인이 충당했어야 할 여행 경비를 엄마, 아빠가 다 내어주고 여비까지 두둑이 줬으니 아들에게도 만족스러운 여행이 되지 않을까 싶다.


부디 3박 4일의 일본 여행이 할머니에게도 손자에게도 소중한 추억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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