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검진 후 CT를 찍어보라고 해서 대학병원에 왔다.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대학병원에는 정말 사람이 많다. 큰 병원에 올 때마다 세상에아픈 사람이 정말 많다는 것을 실감한다. 오전 8시인데도 병원은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병원 내의 카페, 편의점도 북적여서 마치 바깥세상의 풍경을 2배속으로 돌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픈 사람도 많고 아픈 사람을 돌봐야 하는 사람도 많으니 병원은 항상 정신없을 수밖에 없나 보다.
CT를 찍기 전에 먼저 채혈을 해야 한다고 해서 채혈실로 향했다. 순서를 기다리면서 안내문을 읽어보다가 채혈실이 오전 7시부터 오후 9시까지 운영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전 7시부터 문을 열려면 채혈실의 간호사들은 대체 몇 시에 출근을 해야 하는 걸까.
핏줄이 얇아서 채혈을 할 때마다 수난을 겪는다. 작은 병원에서는 담당 간호사가 여기도 찔러봤다 저기도 찔러봤다 결국 실패를 하고 경험이 많은 간호사에게 도움을 청해서 서너 번 만에 성공을 하곤 했다. 그런데 대학 병원에서는 단번에 핏줄을 찾아서 아프지도 않게 채혈을 해주었다. 나이도 그리 많지 않아 보이는데 얼마나 채혈을 많이 했으면 이렇게 한 번에 핏줄을 찾을 수 있는 것일까.분명 그녀도오전 7시까지 출근을 했을 터이고 그러려면 새벽같이 집을 나섰을 텐데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친절하게 다음 절차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이런 고마운 분들 덕분에 우리나라의 의료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고 우리가 보호받고 있다는 생각에 그래도 세상이 살만하다고 느껴졌다.
CT실로 가서 기다리는 동안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기실에는 혼자 거동을 못 하는 중증 환자부터 나 같은 외래 환자들로 가득했다. 거동을 전혀 하지 못하는 환자를 간호사 두 명이 안아서 CT 실로 옮기는 것을 보면서 인간의 존엄에 대해 생각해 본다.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고 의식도 없는 상태에서 과연 인간의 존엄이라는 것이 지켜질 수 있는 걸까.
조영제 부작용에 대한 설명을 듣고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리면서 십여 년 전에 이 병원에 입원했던 기억이 났다. 너무 아파서 입원을 했는데 주변에 온통 나보다 아픈 사람들 투성이니 나의 아픔은 하찮게 느껴졌었다. 같은 병실에 내 또래의 환자가 한 명 있었는데 어린 자식들이 병문안을 왔다 가면 숨죽여서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암을 너무 늦게 발견해서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라고 하던데 마흔도 안 된 나이에 어린 자식들을 두고 떠나야 하는 그녀의 마음이 어떠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퇴원을 한 후에도 오랫동안 그녀 모습이 잊히지 않았고 그녀가 생각날 때마다 기적이 일어나기를, 그녀가 아이들과 조금만 더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기도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CT를 찍었다. 15분이나 걸린다는 CT는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이제 오늘 할 일은 다 했고 다음 예약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불안함에 떨며 또 며칠 밤을 지새워야 하겠지만 그래도 할 일을 하고 나니 후련하다.사실CT를 찍어보는 게 좋겠다는 의사의 말을 들은 것이꽤 오래전인데 두려운 마음에 차일피일 미뤄왔었다.
사람의 수명도 태엽 인형처럼 수명이 다 되면 스르르 멈추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딘가 고장 나고 아프고 꿰매고 덧대면서 사는 삶에서 인간의 존엄이 지켜질 수 있을까.
며칠 후 다시 병원을 방문해서 의사를 만났고 의사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난생처음 CT를 찍고 걱정이 되어서 잠을 못 이뤘는데 큰 병이 아니라니 다행이다.
죽도록 고생만 하다 은퇴를 했고 아직 하고 싶은 일을 절반도 못했는데 다시 또 병원 신세를 지게 될까 봐 두려웠다. 잠을 이루지 못했던 며칠 동안 죽음과 영원하지 않은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